[백세시대 금요칼럼]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1.09.03 14:21
  • 호수 7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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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정년까지 시간 더 남았지만

몸담고 있던 대학에 사표

이제껏 팽팽한 줄 놓을 적마다

늘 새로운 삶이 펼쳐져

은퇴 후 새로운 시작에 기대감

지나간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팽팽하게 잡고있는 줄을 탁 놓아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대학 시절, 연극이 아니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연극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물론 대학생들끼리 모여 하는 연극이었는데, 그즈음, 기성 극단에서 제의가 와 주연으로 캐스팅이 됐다. 

대본까지 받고 연습을 시작할 즈음, 학교와 집에서 허락을 받는 것이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서는 허락을 받았으나, 엄마의 반대에 부딪혔다. 날마다 야단맞고 울며불며 설득했지만 엄마는 단호하셨다. 

막무가내인 나를 엄마가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을 즈음, 갑자기 주연이었던 내 역할이 주인공의 옆집 언니로 바뀌었다. 자그마한 키에 눈이 동그란 아이가 새로 주인공 역을 맡았다. 이유는 내가 키가 너무 커서 그 연극의 주인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일생일대의 연극 데뷔를 앞두고, 학교와 엄마와 전쟁을 하다시피 하여 허락을 받아냈는데, 옆집 언니라니. 나는 생명줄같이 잡고 있던 연극이란 줄을 탁 놓아버렸다. 그 후로 연극을 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오질 않았다.

졸업 후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고, 9시 뉴스 앵커가 됐다. 12년간의 방송 생활은 주로 KBS의 간판 뉴스 앵커로 지냈다. 휴일도 없었고, 휴가도 가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원하던 정점에 서 있는 건 맞는데 많이 지쳤고, 변화와 재충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박수칠 때 떠나자’였다. 영국으로 저널리즘 공부를 하러 떠났다. 예정된 2년 휴직 기간이 끝났지만, 박사학위까지 끝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고,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무모한 용기였다. 달리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면 평생 박사학위를 끝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이번 학기로 몸담고 있던 대학에 사표를 냈다. 정년까지는 아직 좀 더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를 채우느라 팽팽한 줄을 잡고 있기엔 에너지가 부족했다. 좀 더 여유롭게 삶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내게 찾아온 ‘골든 에이지’, 은퇴 후 삶을 좀 더 당겨 만끽하고 싶었다. 돌아보니 연극이라는 줄은 그 분야에 대한 사명감이 없고, 재능도 없던 내게 맞지 않는 일이어서 놓기를 잘한 것 같다. 대신 더 좋아하고 잘 맞는 방송 분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뉴스 앵커의 줄을 놓은 것은 남들이 보기엔 무모했지만, 내게는 용기 있고 모험적인 도전이었다. 

그때의 도전이 없었다면 지금 대학교수로서의 경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은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은 팽팽한 줄이다. 방송은 아직도 내게 영원한 내 일, 내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학교를 정리하고 자유인이 된 것은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정년은 몇 년 더 남았지만 좀 여유롭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니, 학교의 어른께서는 그 사유가 참 맘에 든다며 새로운 결정을 존중하고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뭐든지 일을 맡으면 죽을힘을 다해 완벽하게 해내려고 쉴 틈 없이 애쓰는 내가 너무 애처로워 보였나 보다.

방송국 후배는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다. 철밥통 KBS와 철밥통 교수 자리를 걷어차고 나왔다고, 아까운 직장을 두 번이나 사표 쓴 용기 있는 여성이라며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줬다. 아직 대학에 교수로 있는 동갑내기 친구는 말했다. “부자인가 봐, 나는 생계형 교수라 못 그만둬.”

팽팽하게 잡고 있는 줄을 탁 놓았을 때 내겐 늘 새로운 삶이 펼쳐 졌다. 연극을 포기하고 난 후엔 원하던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공영방송 프라임 타임 뉴스 앵커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방송의 줄을 탁 놓고 공부를 하러 떠났을 땐, 박수칠 때 떠나자는 생각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제 아무 계획도 없이 또 팽팽하던 줄을 놓는다. 모두 어려워하는 시국에 철없이 훌쩍 떠난다. 그런데 기대가 된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워블로거나 파워 유튜버가 되어 보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고, 다음 나올 책의 주제를 제안해 주는 지인도 있다. 우선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의 반 정도 되는 곳으로 주거 장소를 옮겨 볼 생각이다. 오래된 가구와 책과 옷을 대폭 정리해 볼까 한다. 물건이 반이 되면 마음의 짐도 반으로 가벼워지리라 생각한다. 

가벼워진 반의 자리엔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아주 소중한 사람만 지니고 살고 싶다. 남편은 나를 부엌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하니 그 또한 기대되는 일이다.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일들 이번에 크게 마음을 먹고 실천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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