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노인 모독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노인 모독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1.09.17 14:15
  • 호수 7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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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 등

 노인 모독하는 막말을 하다니

 자신이 경험하지 않는 일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자기 발등을 찍는 행위

젊었을 적에 나는 유명한 싸움닭이었다. 혈기왕성(?)했던 40대 중반, 행사 프로그램을 급히 받으러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도산사거리 근처 내리막길에서 시커먼 차 한 대가 신호도 주지 않고 갑자기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한 순간. 

“아저씨, 신호도 주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면 어떻게 해요.” /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천천히 가면 어떻게 해.” / “여기가 무슨 고속도로인 줄 알아요? 더 빨리 달리게. 누구는 안 바쁜가?” / “아니 아줌마는 집에서 밥이나 하지 왜 차 끌고 나와서 차 밀리게 해. 에이, 개나 소나 다 차 끌고 나와서는...” / “그러는 아저씨는 개에요? 소에요? 집에 계시지 왜 끌고 나왔어요?” / “식구들 밥 벌어먹이려고 그런다. 왜!” / “나도 식구들 밥해주려고 장보러 나왔다. 왜요.”

한참 동안 창문을 열고 실랑이를 하다가 그가 먼저 ‘쌩’하고 자리를 떴다. 재수 없다는 듯이 투덜대며 말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말싸움을 하는 바람에 늦어서 친구도 못 만나고 나머지 일들도 줄줄이 엉켜버렸다. 한바탕 속풀이는 했지만 그로 인해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 후로 이런 일에 더이상 나서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오지랖도 참 ‘역대급’이었다. 사람이 바쁘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 내가 그랬다고 그 사람이 반성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이 들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절대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다 세월을 거치면서 경험으로 얻게 된 지혜 때문이다.

얼마 전에 TV에서 인기리에 방영했던 ‘윤식당’이란 프로가 있었다. 해외에서 작은 식당을 차리고 가게를 운영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인데, 출연진은 이서진, 정유미, 그리고 윤여정이었다. 이중 윤여정은 70대인데도 불구하고 풍기는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여기에 윤여정이 없었다면 그런 폭발적인 인기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만큼 나이 든 사람이 주는 든든함과 묵직함은 무시할 수 없다.

정치인 지망생이 정치판에 막 뛰어들 때, 혹은 잘하던 정치가 꼬일 때, 그때마다 조언을 구하러 찾아가는 사람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연로하신 어르신들이다. 중요한 자리마다 유독 빛을 발하는 사람들도 팔팔한 젊은이들이 아니라 다 삶에서 지혜를 터득하신 어르신들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멘토인 이 어르신들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다. ‘30·40대에는 훌륭한 인격체였을지라도 20년이 지나면 뇌세포가 변해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다. 60대가 되면 책임 있는 자리에는 가능하면 가지 않고, 65세가 되면 절대로 가지 않겠다’던 Y작가. 

‘젊은 층의 총선 투표 참여를 위해 곧 무대에서 퇴장할 분들인 60·70대는 집에서 쉬시고 투표를 안 해도 된다’고 했던 지난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의 J의원.

최근에는 한 사람을 콕 집어 막말을 퍼부은 변호사도 있었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 법률대리인 정철승 변호사이다.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원로 철학자가 한일관계 악화를 이유로 들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에서 정 변호사가 그를 향해 한 말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60여 년 동안 정권의 반민주 반인권을 비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 100년 동안 멀쩡한 정신으로 안 하던 짓을 탁해진 후에 시작하는 것인지, 노화 현상이라면 딱한 일이다.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늘 적정한 수명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고대의 귀족 남성들은 자신이 더이상 공동체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쳤는데 그것을 존엄을 지키는 죽음, 즉 존엄사라고 불렀다. 대략 그 나이가 7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글쎄, 나도 스스로 곡기를 끊어야 될 날이 10년도 안 남았다는 말인가.

정치성향이 자기와 다르다고 저렇게 막말을 해도 되나. 정 변호사가 나보다 나이가 젊으니 그가 70대 중반에 곡기를 끊을지 아닐지 확인하기는 힘들겠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작정이다.

Y작가도 2~3년이 지나면 ‘절대로 책임 있는 자리에 가지 않겠다던’ 65세가 된다. 그때 그는 뭘 하려나. 뇌세포가 변해서 전혀 다른 인격체로 바뀌었을라나. J 전 의원도 이제 그가 말한 70대가 다 됐다. 어쩌면 지금쯤 무대에서 퇴장하고 집에서 쉬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이따금 내게 했던 말이 ‘너도 늙어 봐라. 넌 안 늙을 줄 아냐’였다. 그 무엇이 엄마를 서운하게 했을까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하고 후회를 한다. 

어쨌거나, 그 무엇이든 간에 경험하지 않은 일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자기 발등을 찍는 행위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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