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가을비는 내리고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가을비는 내리고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1.10.15 14:27
  • 호수 7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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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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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바닥 빗소리는 통통 튕기고

갈대에 떨어진 비는 또르르

양철 지붕의 비는 시냇물 소리

여기에 참새소리‧바람까지 더해

비오는 날은 자연의 합주 듣는 듯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린다. 문제는 며칠 전 불었던 바람인듯 싶다. 이제는 차가워져야 할 동해 바다가 뜨거워져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댔다. 이 바람이 북쪽의 찬 기운을 만나면 비가 많이 내리겠다 했는데, 어설픈 내 예보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비가 내리니 기온도 뚝 떨어지고, 차가운 습기에 온몸이 시리다. 새벽 화장실 가는 길에 저절로 내 손가락이 보일러 올림 버튼에 머문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어스름 새벽에 창문 밖 정원에 내리는 빗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비는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거라는 걸 시골집 작은 한옥에 살면서 더욱 실감한다. 

도시에서 내가 맞은 비는 늘 구질함과 조급함을 동반했다. 비 내림은 곧 출근길이 고달플 것이라는 예보였다. 빗소리는 도로를 할퀴고 지나가는 차량의 쎄한 금속음으로 다가왔고, 어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이중, 삼중의 유리창 방음에 막혀 마치 가위눌림에 막힌 내 목소리처럼 둔탁하기만 했다. 

그러다 들은 어떤 지인의 일화는 마음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늘 들고 다니는 가방에 손 우산을 넣어놨는데, 이것을 2년 동안 펼쳐본 적이 없다고. 나 역시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 

분신처럼 출근길에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온갖 상비약, 필기도구, 읽으려고 마음먹었으나 읽지 않은 책, 우산, 화장용 파우치까지. 가방끈이 끊어질 정도로 무겁기만 한데, 정작 그 안에 내용물을 꺼내서 필요한가, 아닌가, 언제 썼던가를 체크한 적도 없었다. 

이런 무거운 가방 속에 우산을 두고, 펼 일도 없이 집 주차장에서 회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었던 셈이다. 까닭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던 적이 있던가?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의 리듬을 귀속에 담아 봤던 시간이 있었던가? 

하지만 요즘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의 비 오는 날은 사뭇 다름을 느낀다. 정원사의 휴식을 위해 신이 비 오는 날을 만들었다는 서양 격언처럼 일단 비가 오면 모든 일을 접는다. 

집안에 앉아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나도 모르게 멍하게 바라본다. 요즘 하는 말로 ‘비멍’이랄까? 비가 내리는 풍경을 오래도록 보다 보면 빗소리가 여기저기 다르게 울린다는 걸 알게 된다. 

깔아놓은 벽돌 바닥에 부딪친 빗소리는 통통 튕겨 오른다. 잔디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푹푹 소리가 먹히고, 이제 막 이삭을 피운 갈대에 떨어지는 비는 푸석 또르르 가볍고 빠르다. 산딸나무 잎에 떨어진 비는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다 바람이 불면 후두룩 한꺼번에 요란해진다. 

양철 지붕의 골을 타고 내리는 비는 묘하게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사무실 앞 작은 돌확에 담긴 물속에 떨어지는 비는 뽕뽕거리며 동심원을 그린다. 이 많은 빗소리가 정원에 가득하면 빗소리의 합주가 시작된다. 

그리고 잔잔한 여러 대의 바이올린 합주 같은 빗소리를 뚫고 나오는 참새 그룹의 재잘거림은 플루트같고, 중저음으로 꺽꺽거리는 산까치는 트럼펫, 가끔씩 길게 상공에 퍼지는 강렬한 직박구리 울림은 오보에의 긴 호흡 같다. 거기에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은 심벌즈의 그라데이션처럼 비 내리는 정원 소리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Pastoral’은 5번 운명이나, 3번 에로이카처럼 강렬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니아층에서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총 다섯 장인 이 교향곡은 첫 장에서 작은 새의 반가운 인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고, 두 번째 장은 시냇물이 흐르는 강가를, 세 번째 장은 시골 사람들의 즐거움을, 그리고 네 번째 장에서는 천둥과 비바람이 치는 모습과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비바람이 지나간 후 다시 찾아 든 정원의 고요와 편안함을 그린 곡이다. 시골 생활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베토벤은 이 6번 교향곡을 작곡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고단하다. 그래서 적어도 비 오는 날, 어느 시간의 한 토막을 끊어내 이 자연의 합주를 온전히 들어본다면 그게 고단함을 달랠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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