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살기 ‘박치기’로 통쾌한 승리감 안긴 스포츠 영웅 김일
필살기 ‘박치기’로 통쾌한 승리감 안긴 스포츠 영웅 김일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10.22 15:25
  • 호수 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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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왕’으로 유명했던 프로레슬러 김일은 1960년대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상흔으로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며 사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김일(오른쪽)이 일본의 전설적 프로레슬러인 자이언트 바바와의 경기에서 필살기인 박치기를 선사하는 모습.
‘박치기왕’으로 유명했던 프로레슬러 김일은 1960년대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상흔으로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며 사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김일(오른쪽)이 일본의 전설적 프로레슬러인 자이언트 바바와의 경기에서 필살기인 박치기를 선사하는 모습.

역도산 문하 혹독한 수련… 바바‧이노키 등과 일본 레슬링 인기 견인

국내로 돌아와 프로레슬링 전성시대 열어… 지난해 대전현충원 안장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오는 10월 26일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42주기이다. 그리고 이날은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또 다른 ‘영웅’의 15주기이기도 하다. 박 전 대통령도 그의 팬으로서 직접 활약을 보기 위해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를 이끈, 박치기왕 ‘김일’(1929~2006) 이야기다. 

전남 고흥 출신인 김일은 어릴 적부터 기골이 장대했고 힘이 남달랐다. 각종 씨름대회에서 우승해 송아지를 끌고 오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는 함경남도 출신 역도산(1924~1963)이 레슬링계를 주름잡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평소 역도산을 동경했던 김일은 1956년 부산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출전했다가 밀항을 감행한다.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됐고 1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된다. 이때부터 김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역도산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김일의 정성에 감복한 역도산은 직접 신원보증을 해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후 세계 프로레슬링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그를 1기 문하생으로 받아준다.

김일은 ‘오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라는 일본식 링네임(링에 오를때 쓰는 별명)으로 역도산이 설립한 일본프로레슬링협회(JWA) 선수로 데뷔한다. 이후 이노키, 바바와 함께 ‘젊은 삼총사’로 불리며 일본의 레슬링 인기를 견인했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키면서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는 지론과 함께 필살기로 통하던 박치기를 전수했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나무에 문지르고, 몇 미터 밖에서 뛰어와 벽에 부딪히게도 했다. 모진 훈련을 이겨낸 김일은 1963년 WWA(세계프로레슬링협회) 세계챔피언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온다. 챔피언 벨트를 두른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해 12월 스승이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된 것. 역도산이 시비가 붙은 야쿠자의 칼에 찔려 허망하게 사망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한국레슬링을 일으키기 위한 모색에 들어간다. 그렇게 탄생한 대회가 1965년 8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열린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이다.

김일이 이끄는 한국프로레슬링협회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대회로 양국을 대표하는 레슬링 스타들이 출동했다. 예선 끝에 결승에 오른 건 김일과 일본의 요시노 사토였다. 

양국을 대표하는 레슬러가 맞붙은 한일전은 당시 최고의 주목을 받았다. 결승전 당일 김일은 한국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에서 김일은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승리가 사토에게 넘어가려던 그 찰나 김일은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기적같이 부활한다. 그리고 작렬하는 ‘박치기’에 사토는 나가떨어지고 김일은 제1회 극동헤비급챔피언이 됐다

드라마틱한 결과로 인해 대회는 대성공으로 마무리됐고 TV는 물론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했다. 일제와 동족상잔의 비극에 시달린 상처를 시원하게 날리는 승리로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김일은 스포츠 영웅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에도 박치기를 앞세운 김일의 통쾌한 활약은 계속됐다. 1967년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30여년 간 20여 차례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의 경기는 하나의 공식이 있었다. 초반 수세에 몰렸다가 되치기로 승리를 목전에 두고 반칙을 당해 큰 부상을 입는다. 얼굴에 피를 철철 흘리며 패배를 앞둔 순간 관중들의 응원 함성이 커지고, 이에 힘을 얻은 그가 분노의 박치기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1960년대 전쟁 이후 극심한 빈곤을 겪던 국민들은 그에게 ‘박치기왕’이라는 별명을 선물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비록 “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의 폭탄선언 이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서서히 저물었지만 김일은 1970년대까지 그 인기를 꾸준히 이어간다. 

1987년부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에 힘썼고, 1995년 일본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졌다.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진행된 은퇴식에서 그는 비록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지만 마지막으로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떠나며 큰 감동을 선사했다. 

2006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는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다. 사후에도 체육훈장 청룡장에 추서됐고 2018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됐다. 2020년에는 한국 체육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국립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스포츠인의 국립묘역 안장은 2002년 손기정(마라톤), 2006년 민관식(전 대한체육회장), 2019년 서윤복(마라톤), 김성집(역도) 이후 다섯 번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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