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대통령의 촌지
[백세시대 / 세상읽기] 대통령의 촌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10.29 14:12
  • 호수 7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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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1932~2021년)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듣고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다. 기자는 노 전 대통령이 씀씀이가 컸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오래 전 기자들 사이에서 돌려보는 ‘신문협회보’에 대통령의 촌지에 대한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4100억원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드러났고 그 때문에 징역형을 살았다. 추징금 2600여억원을 선고 받고 뒤늦게 완납하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돈을 걷어 들인 만큼 언론인들에게도 잘 풀었던 것 같다. 

6공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의례적으로 주었던 촌지는 일 년에 4~5차례였다. 대통령 취임기념일, 신문의 날, 휴가, 추석, 연말 등에 정기적으로 촌지가 내려갔다. 유력 언론인 관리 차원에서 출입기자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전 출입기자, 전·현직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까지 포함됐다.

촌지 단위는 두 자리에서 많은 때는 세 자리까지였다. 한 중앙일간지 기자는 “개인 베이스 차원의 촌지도 있었다”며 “청와대에 출입하다 떠나게 되면 노 대통령과 독대를 하는 일이 관례였고 이 때 액수를 알기 힘든 전별금이 건네졌다”고 밝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 전별금은 천만 원대였고, 노 대통령의 그것은 백만 원 대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한 시사주간지의 해외특파원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봉투의 액수가 3000달러(당시 돈으로 240만원)였다”며 “너무 큰돈이라 현장에서 돌려주었으나 다음날 다시 보내왔다”고 했다.

6공 말기 청와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언론사와 가진 개별 회견이 50회, 연두 기자회견 등 합동 회견이 6회, 출입기자 간담회가 15회였다. 그때마다 상당한 촌지가 기자들에게 건네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대통령 부인도 촌지에 인색하지 않았다. 김옥숙 여사는 추석과 연말 등 일 년에 서너 차례 언론인에게 촌지를 건넸다. 대통령 부인 및 가족에 대한 보도는 주로 여성지 기자들의 영역으로 일부 기자가 수혜(?)의 대상자였다. 

한 여성지 기자는 “수해 복구 현장을 찾은 김옥숙 여사의 근황을 여성지에 게재한 직후 김 여사를 수행하는 비서관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며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만난 비서관이 겉봉에 ‘대통령 노태우’라고 인쇄된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고 기억했다. 봉투 안의 액수는 50만원이었다.

또 다른 여성지 기자는 “추석 명절마다 김 여사 수행 비서관으로부터 흰 봉투를 받았다”며 “언젠가는 비서관이 10여개의 봉투를 건네며 ‘여성지 기자들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전두환 전 대통령도 손이 컸다고 한다. 그 역시 수천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해 형을 살았고 추징금 선고도 받았지만 여전히 완납을 미루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전국의 신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던 때에 한 여성지 기자가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산중 생활을 취재하기 위해 백담사를 찾았다. 

이 여성지 기자는 “전두환 씨가 신자들에 둘러싸여 접근이 어려워 인터뷰는 하지 못한 채 명함만 주고 인사만 나눈 채 돌아왔다”며 “이후에 전두환 씨 부부의 현장 분위기만 기사화했는데도 비서관이라고 밝힌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하더니 봉투를 내밀었다”고 기억했다. 봉투 안에는 30만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의 언론인 촌지 관행은 김영삼 정부로 넘어와선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투명한 경제 질서 확립의 일환으로 실명제를 실시한 김영삼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한 언론인은 “대통령 관련 기사를 썼지만 칼국수 한 그릇 얻어먹은 게 전부였다”고 농담처럼 얘기하기도 했다. 

6공 때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 부고를 접하고 각별한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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