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짐은 가볍게, 마음은 풍성하게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짐은 가볍게, 마음은 풍성하게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1.11.12 13:55
  • 호수 7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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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절반 줄어든 집으로 이사하려니

정리하고 버리는 게 머리 아파

나눔마켓 통해 정리했는데도

아직 버려야 할 물건이 산적

눈물 머금고 버리니 이젠 기대감

최근 집 정리와 이사를 한 세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년 살던 집을 정리하고 서울 근교로 나가게 된 선배는 몇 달 전부터 골머리를 앓으며 몸에 병이 나면서까지 집 정리를 했다. 또 한 친구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딸 여럿이 모여 몇 날 며칠 엄마 유퓸 정리를 했건만 도무지 끝나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또 한 분의 이야기는 아내가 중한 병환이 들어 중환자실에 모셔두고 남편 혼자 이사를 하게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내의 물건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인데, 가슴이 너무 아파 더 긴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상황과 경우는 달라도 결국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사람이 사는데 무슨 물건이 이리 많이 필요한지 정확히 말하면, 필요 없는 물건을 어쩌면 이리도 많이 쌓아두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물건을 정리할 때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했지만, 가까운 가족이 남겨놓은 물건을 정리하면서도 모두 치를 떨었다. 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물건은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두고 살아왔을까?

곤도 마리에는 그녀의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에서 내게 꼭 필요한 것, 설레는 것만을 남기고 다 버리라고 한다. 너무나 간단한 그녀의 정리 비법은 전 세계로 퍼져 각광을 받았다. 그만큼 정리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다.

최근 먼저 살던 곳보다 공간이 반 이상 줄어든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나도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 결혼 후 대 여섯 번 이사를 했지만, 이번엔 더 겁이 났다. 이사 두 달 전부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가장 버리기 어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값나가는 장신구나 패물도 없고, 명품 가방도 딱히 없는 나는 무엇을 그리도 못 버리고 끼고 살고있는 것일까? 몇 번의 이사를 통해 옷도 많이 없어졌고, 동생이 신발장을 열어보고 놀랄 만큼 신발도 몇 켤레 없는 편이다. 둘러보니 책이나 자료 등이 문제였다.

내가 줄을 치며 보았던 책, 앞으로 글을 쓰려면 보아야 할 책들이 문제였다.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나의 판단력이 흐려지기를, 이 책을 버리는데 아무 판단도 없이 마구 버릴 수 있기를! 마침 몸담고 있던 대학에서 퇴직을 했기 때문에 이제 마음 놓고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바코드를 찍어보아 중고 서점에서 받아주는 책은 그쪽으로 보내고, 그것도 안 되는 책은 열 권씩 끈으로 묶어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다가, 폐지처럼 넘겼다. 

공간을 반 정도 줄여 이사 간다는 것은 물건을 반으로 줄인다는 뜻이 아니었다. 4분의 1, 더 심하게 말하면 거의 다 없앨 정도로 줄여야 했다. 문제는 큰 덩어리 가구들이었다. 나눔을 하는 중고마켓을 시작했다. 시집올 때 마련해 온 가구 중 남아있는 화장대, 서랍장 등 큰 덩어리는 직접 사용하실 내외분이 와서 가져가셨다. 

딸이 쓰던 침대 프레임도 착한값에 내놓았더니 6살 아들을 위해 침대 매트리스만 사려 했던 젊은 아빠가 기쁜 마음으로 사가셨고, 냉장고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 대사관 직원이 친구들 넷을 데리고 와서 끙끙대며 옮겨갔다.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래 다정한 시간을 보냈던 식탁도 좋은 분에게 보내드렸다. 다시 쓸 수 있는 생활용품들과 남자 옷은 모두 잘 정리해서 서울역 근방에서 노숙인 사역을 하시는 드림시티에 보내 드렸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고 정리하고 나누었지만 남편의 눈엔 마땅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정리한다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도 대폭 버리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던 것이다. 이사 전날 밤, 드디어 폭발을 하고 말았다. 이 물건들을 또다시 이고 지고 가면 더 이상 둘 곳이 없는데 어쩌려고 하느냐고 정색을 했다. 나는 열심히 필요 없는 것을 버렸지만, 남편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옳다.

입술을 깨물고 옷을 또 열 벌쯤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그냥 모셔 가려던 사진 가득한 상자와 지나간 방송 테이프 상자도 모두 쓰레기통에 쓸어 담았다. 눈물이 났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이사는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들어가는 이사 날짜가 안 맞아 짐은 모두 창고에 맡기고 요즘 우리는 방랑 생활을 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해보고 싶다고 노래를 했는데, 소원대로 임시 거처에서 한 달째 살고 있다. 어떠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답했다. “편해서 좋아요. 노 설거지, 노 빨래, 노 청소!”  

단칸방에서 집밥도 못 먹으며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까 걱정 어린 질문이었는데, 너무 좋다고 대답하니 물어본 사람이 멋쩍어했다. 이사와 정리에 지친 나는 심통이 많이 나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적응이 되고 만 것인지 지금은 창고에 있는 물건이 하나도 아쉽지 않다. 뿐만아니라 지금 있는 단칸방(?) 보다는 훨씬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니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그래, 이제 이렇게 살자. 짐은 가볍게, 그리고 마음은 풍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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