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내게도 선물이 필요해 / 엄을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내게도 선물이 필요해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1.11.26 14:43
  • 호수 7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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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평생 최선을 다해 살아온 당신

자식이나 남편 또는 아내가

알아주지 않는다며 원망 말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줄

귀한 연말 선물 하나 준비해 놓자

살도 없는 둥근 닭의 갈비뼈(계륵이라 하던가)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오래 전 일이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여성 모든 문제 상담소’를 할 때 만났던 한 여성의 사연을 이야기로 시작해본다.

“당신이 무슨 옷이 필요해? 집에만 있으면서.” 백화점 남성복 코너에서 와이셔츠 한 벌을 팔에 걸친 채 남편이 한 말이다. 에이, 꼭 그렇게까지 콕 집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난 그저 “당신이 옷 입어보는 동안 여자 코트 좀 구경하고 오겠다”는 말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하긴 그 말도 맞다. 남편 그리고 아들 둘, 세 남자 챙겨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회사 보내는 일이 전부이며 외출할 일이 전혀 없는 내게 뭔 옷이 필요하겠는가. 

사실은 내게도 아주 좋은 코트가 있다. 시집올 때 우리 아버지가 사주신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모직 코트. 요즘 옷 만드는 기술이 좋아졌는지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멀쩡하다. 

쇼핑을 끝내고 저녁에 먹을 전기구이 통닭 두 마리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식탁 위에 통닭과 김치랑 절임 무를 대충 차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세 남자가 각자 닭다리 하나씩을 뜯으며 내게 접시 하나를 건넨다.

“여기 엄마 꺼야. 엄마는 닭다리 싫어하지? 그래서 닭모가지랑 몸통이랑 모아놨어.” 아니야. 나도 쫄깃쫄깃한 닭다리랑 날개를 더 좋아해. 그 뼈만 많은 몸통이랑 모가지는 먹을 게 별로 없잖아.

이 말이 ‘내 모가지’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난 저것 말고도 먹을 것이 차고도 넘친다. 어제 먹다 남긴 고기가 많이 남은 고추장찌개도 있고 돼지 냄새가 난다고 세 남자에게 외면당하고 고스란히 남은 제육볶음도 있다.

세 남자가 떠난 자리에, 나만의 식탁을 다시 차리고 앉았다. 먹다 남은 찌개는 불에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사이 걸쭉하니 너무 텁텁하고, 제육볶음은 여전히 돼지 냄새가 심하다.

대충 밥을 물에 말아 깻잎장아찌 하나씩 얹어서 목에 넘기고는, 따뜻한 물에 우엉 조각 몇 개 넣어 밖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 의자에 앉았다. 나 지금 옳게 사는 건가. 저 세 남자의 머릿속에 ‘엄마, 아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비싼 외출복보다는 자주 쓰는 빨간 고무장갑이나 앞치마가 더 요긴한 여자. 치킨 먹을 때마다 늘 닭 뼈만 손에 들고 쪽쪽 빨고 있으니 넓적한 닭다리보다는 목뼈만 좋아하는 씩씩한 여자?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가.  

벗어놓으면 우스꽝스럽고 제멋대로인 빨간 고무장갑보다는 한 손에 쏙 들어오고 포근하게 감기는 앙고라 장갑과 반짝반짝한 예쁜 옷을 더 좋아하고, 보기에도 흉한 ‘닭모가지’보다는 들고 뜯기에도 우아한 닭다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음,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이 내게도 있다. 생선 뼈가 목에 걸릴까 걱정되어 일일이 가시를 발라서 내 밥숟가락에 얹어주던 엄마가 있고, 행여나 입은 옷이 초라해 기죽으면 어쩌나 싶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짝반짝 예쁜 옷을 사주시던 아버지도 있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에게 남편이 한마디 한다. “당신 낮잠 많이 자지마. 그러니까 잠이 안 오잖아.” 낮잠? 하루종일 청소, 빨래만 했다.

창밖이 뿌옇게 밝아온다. 해가 올라오나 보다.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도착한 부산 자갈치시장. 이제 막 점심이 지난 시간이라 그런가. 시장은 한산했다. 후덕해 보이는 아줌마가 있는 횟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제일 비싼 거 주세요.” 애들 보충수업비보다 비싼 자연산 전복을 입에 한 점 넣었는데 생각만큼 맛이 없다. 이게 한 점에 만원? 몸에는 엄청 좋을 거야. 나도 이만큼 비싼 거 먹을 자격 충분해.

그날, 소주 한잔에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전복 한 접시 다 비우고는 그길로 다시 기차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절대로 너를 잊지 마라. 넌 정말 훌륭한 사람이거든. 네가 네 자신을 막 대하면 누가 너를 귀하게 여기겠니.’

집으로 가는 내내 기차 안에서 펑펑 울며 이 말을 다짐 또 다짐했다던 그 여자. 현명한 그녀의 해결책으로, 그녀는 자신도 찾고 가정도 잘 꾸려나가며 지금도 잘 살고 있으리라.

선물.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이란 뜻이란다. 이것을 ‘남 또는 자신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으로 바꾸면 어떨까. 

허리가 휘고 손가락이 구부러지도록, 평생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당신. 남이 알아서 해주기만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자식이나, 남편이나, 부인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도 말고 섭섭해하지도 말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줄 귀한 선물 하나 준비해 놓자. 그래도 연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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