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손편지와 고전의 힘 / 이호선
[백세시대 금요칼럼] 손편지와 고전의 힘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21.12.03 14:43
  • 호수 7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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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문자, 카톡 같은 SNS로

소통하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손편지 쓸 때의 설렘과 뿌듯함

답장이 올 때까지의 긴장감은

대체할 수 없는 경이로움 선사

나성에 가면 편지를 전해달라고 울먹이던 노래가 있었다. 펜팔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어린이용 잡지에도 이름과 주소가 버젓이 올라와, 누구든 마음 가는대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지금 같아서야 개인정보가 그 정도로 노출이 되면 이미 신상이 털리고 대포통장이 수두룩할 테지만, 그때는 노출의 낭만이 있었다. 

자신을 알리고 삶을 나누고 개들도 함께 뛰어노는 동영상이 대세를 이루는 이때, 때아닌 손편지는 매우 희소한 아날로그의 상징이 되었다. 그 옛날 손편지는 용기를 내어 전한 사랑의 메시지이거나, 혹여 라디오에 방송이 되려나 싶은 마음에 글로 쓰고 귀로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손편지는 문자나 카톡과 같은 SNS를 통해 이루어진다. 직접 그렸던 그림은 이모티콘이 대체했고, 1000마리를 접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종이학은 기프티콘이 대신하고 있다.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 

그러고 보면 손편지는 참으로 낭비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니 종이 낭비요, 써가는 펜과 잉크를 소비하니 물자 낭비이며, 상대가 받을지 알 수 없어 감정 낭비이고, 그 시간에 땅을 파면 백 원짜리라도 나올 시간 낭비이다. 보관도 귀찮으니 공간 낭비다. 

심지어 연애편지를 들키는 날엔 놀림 받고 욕먹고 매 맞고 뺏기고 출입 금지를 당하기도 했으니 위험하기까지 하다. 

바야흐로 SNS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우푯값을 안내도 복사해 붙여 여럿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보내니 가성비 좋고, 썼다 지워도 돈이 들지 않으니 경제적이며, 여러 개의 공짜 이모티콘으로 글솜씨를 넘어서는 감정표현이 가능하니 가심비도 최고다. 상대가 읽었는지 내용 옆 숫자로 알 수 있고 상대가 읽지 않았다면 5분 안에 지울 수도 있으니 실수 예방 기능까지 갖추었다. 

위험한 손편지와 가성비 높은 SNS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손편지는 유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옛날에는 플래카드도 손으로, 극장간판도 손으로 그렸다. 요즘 손으로 하는 건 대부분 사라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라디오에서 가끔씩 손편지로 누군가 보냈다면 거의 100% 소개될 가능성이 높으니 유물 찬스를 한번 써보시라!

이런 유물 같은 손편지는 내게 고전(古傳)이다. 요즘 같은 편리하고 빠르고 쉬운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고전은 두껍고 지루하며 어렵고 심지어 주인공들 이름마저 길거나 한자(漢字)다. 시작하려면 망설여지고, 시작해서도 멈추기 십상이며, 너무 두꺼워서 줄거리에서 길을 잃기 쉬우며, 다 읽고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것도 태반이다. 그래서 요즘은 고전을 요약된 동영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시스티나 성당에 대한 가이드북을 읽는다고, 성당의 압도적 분위기와 그 냄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낡은 벽의 벗겨진 세밀한 틈, 그리고 그 낡음의 역사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한 경이로움을 알 수 있을까. 

세밀한 전율과 공감각으로 경험했던 그 짜릿함, 잊을 수 없는 공간의 냄새, 공기의 맛, 망막을 후려치는 색감과 그림의 역동성, 미사의 장엄한 찬양으로 비벼지는 거룩함 앞에 꼬꾸라지는 경험을 알 수 있을까?

손편지, 그 설렘, 텅 빈 종이에 앉은 꽉 찬 존재인 나, 편지지 칸 굵기에 맞는 펜 굵기를 정하는 그 섬세한 결정, 틀리지 않으려는 노력, 공간을 채워 어색함을 최소화하려는 그 영혼의 고투, 마지막 마침표와 서명 후의 뿌듯함, 다시 읽어보며 커지는 눈, 선별된 단어들과 치밀한 문장들, 단어 사이 공간의 어색함에 대한 인내, 봉투에 적는 주소, 그리고 혀에 대어 풀 끈기로 붙여낸 우표, 그리고 우체통에 넣기까지! 

이 미칠듯한 감정 드라마는 써본 이만이 알 수 있는 스릴러이다. 답장이 올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 불확실성과 상상! 글보다 시간이 사람을 더 미치게 한다. 

사람은 기억과 기록을 남긴다. 역사에 남을 리 없는 평범한 우리는 그저 생애 유일한 기록일 수 있는 유언장과 편지와 메모 정도로 남을 것이다. 유언장은 유언을 받는 이들에게 감정과 물질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손편지는 연인에게,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손주에게 끊어지고 해석된 기억을 연속적이고 선명한 기록으로 넘겨줄 것이다. 영혼의 잉크로 글을 적어 심장의 박동으로 전달하는 유일한 나의 존재의 기록이 될 이 거대한 기록을 시작해보자. 어색함은 처음이 아니니,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실력이 아니라 사랑을 전해보자. 사랑의 역사기록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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