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겨울 정원에서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겨울 정원에서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1.12.17 14:21
  • 호수 7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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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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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꽃 피우기는

찰나를 위해 수십 배의 시간을

참아낸 후에야 얻어지는 결과물

우리의 겨울도 잘 기다리면

따뜻한 봄을 맞을 거라 믿어

오늘 아침은 하얀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두꺼운 외투만 걸친 채 정원을 걸으니 시린 기운이 종아리까지 전해진다. 이렇게 추워지나 싶은데, 동쪽에서 떠오른 햇살이 남으로 접어드니 어느새 정원이 다시 포근해진다. 

우리의 사계절은 어쩌자고 이리도 뚜렷한지 지글거렸던 영상 40도 가까운 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불현듯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더니 벌써 소설을 지나 대설을 건너는 중이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었으니 찾아올 동지, 소한, 대한을 넘어야 2월 초, 입춘을 맞는다.

민족성은 그 지역의 날씨를 닮아간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당연히 우리 민족도 이 땅의 날씨를 닮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성격이 불같이 뜨겁기도 하고 얼음장처럼 차기도 하고, 유행과 변화에 재빠르고 민감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건 이 변화무쌍한 날씨에 맞춰 살면서 생긴 우리의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만 이런 건 아니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도 같은 적응력을 키워간다.  

몇 년 전 겨울은 백일이 넘도록 비도, 눈도 오지 않아 속초 일대는 겨울 가뭄이 극심했다. 이 가뭄으로 안타깝지만 다음해 싹을 틔우지 못한 식물도 많았다. 또 작년 겨울은 눈 없이 지나가나 했는데 3월 잎눈, 꽃눈이 막 싹을 올릴 때, 1미터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습설은 물기가 많아 무거운데 그게 1미터로 쌓였으니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의 나무 잔가지들이 부러졌다. 그때 여파로 우리 집 정원의 스카이로켓 향나무는 뾰족하게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부분이 부러지고 갈라져 영 볼품이 없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모질고 힘든 겨울 탓에 사라지는 식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꺾이고 잘리고, 부러져도 온 힘을 다해 다시 재생을 시도한다. 죽은 줄 알았던 대나무는 봄에 초록을 잃고 마르더니, 여름에 다시 아랫부분에서 새싹이 나왔고, 스카이로켓 향나무도 부러진 가지에서 다시 새순이 돋았다.

며칠 전 튤립 알뿌리를 심기 위해 파종기로 흙을 파다 보니 작년에 심은 백합의 알뿌리가 땅 속에서 새싹을 이미 틔우고 대기 중이었다. 열면 안 되는 남의 집 문을 열어, 보면 안 되는 속살을 본 듯 놀란 가슴에 얼른 덮어주었다. ‘내년 여름에 보자’는 미안함의 인사를 덧붙이며. 

그런데 덮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백합이 견뎌야 할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 나도 모르게 ‘너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싶었다. 이제 겨울의 시작인데, 백합은 내년 봄 튤립꽃도 피었다 질 무렵에서야 이 싹을 올릴 참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백합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날 ‘참 예쁘다’는 말로 끝내는 ‘식물의 꽃 피우기’는 식물 입장에서는 이 찰나를 위해 수십 배의 시간을 준비하고, 참아낸 후에야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런데 어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리지만 강건한 어느 야구 선수의 야무진 말에 그 백합의 알뿌리가 다시 한 번 생각났다. 안타와 홈런을 치는 찰나 그 십여 초의 쾌감, 그게 너무 좋아서 그 순간을 위해 하루에 200번이 넘는 타구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하고 있다고. 백합의 기다림과 다르지 않은 우리 삶의 원리가 그 젊고 발랄한 선수를 통해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예측 불허의, 그래서 불안한 우리 삶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을 얼마나 대비하고 피할 수 있을까. 다만,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지금은 힘듦이 찾아온 시기임을 알아차리고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내가 본 백합의 알뿌리는 그대로 잘만 기다리면 내년 봄, 어느 따뜻한 날에 분명히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게 분명하다. 백합이 그러하듯, 우리의 겨울도 이대로 잘 기다리면 따뜻한 봄을 맞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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