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새해에 들어보는 백영호 노래의 아름다움
[백세시대 금요칼럼] 새해에 들어보는 백영호 노래의 아름다움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1.12.31 11:27
  • 호수 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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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부산서 태어나 성장한 백영호는

 1950년대부터 작곡가로 맹활약

‘추억의 소야곡’ 등 100여곡 히트

 가수 이미자와도 콤비

‘동백아가씨’ 등 불후의 명곡 남겨

노래 한 곡이 만들어지려면 우선 작사와 작곡의 멋진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작사가 먼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작곡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작사가는 노랫말에 담긴 의미와 정서를 통해, 작곡가는 리듬이라는 악곡의 절묘한 교직과 변화를 통해 작품성의 최대치를 살려내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것을 적절히 선정된 가수가 마지막 처리를 극대화시켜낸다. 가요작품의 기본적 세 요소인 작사, 작곡, 가창은 이처럼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나 흠결이 없어야 하고, 완벽한 조화로 미적 예술적 가치를 드높여야 한다. 

다시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곡가 백영호 선생의 작품을 새롭게 음미해보고자 한다. 백영호(白映湖·1920~2003)는 부산 서대신동 출생으로 본명은 백영효이다. 

모든 인간의 터전이 그러하듯 백영호의 성장 과정과 그 토대는 오로지 부산이었다. 서대신동은 구덕산을 중심으로 승학산, 동매산, 엄광산, 구봉산 등에 둘러싸여 자리 잡은 여러 군데의 마을이다. 그곳을 둘로 나누어 동쪽을 동대신동, 서쪽을 서대신동이라 했다. 

이곳은 바닷가보다는 다소 언덕이어서 해안 쪽의 야트막한 보수산, 용두산을 바라보며 광활한 바다로 이어져 있다. 예로부터 호젓한 주거환경을 즐기는 부산시민들이 주택지로 선호하던 곳이기도 했다. 송도와 암남 지역, 부민동, 남포동, 남항과 북항, 자갈치와 영도, 해운대에 이르기까지 부산항과 그 주변 일대는 백영호 성장기의 요람이자 활동무대였다. 

20대 시절, 가족들은 백영호의 음악공부를 적극 반대했지만 집을 나가 기타 하나를 메고 떠돌이 체험을 가졌다. 근대사의 혼란기에 백영호는 일찍이 고국을 떠나 방랑의 시절을 거쳤으며 만주의 신징에서 음악학원을 다니며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아득한 변경지역인 내몽골자치주 후후호트까지 유랑하며 음악인의 생활을 했다.

1947년 백영호는 부산으로 돌아와 야인초가 차린 코로나레코드사의 일을 도왔다. 하지만 영세하기 짝이 없는 그곳은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절대적 공간이 되지 못했다. 이어서 1954년부터 일을 하게 된 곳은 부민동에서 임정수가 문을 열었던 미도파레코드(지구레코드사의 전신)였다. 

당시 부산에는 임정수의 미도파와 한복남의 도미도 두 레코드사가 대표적 음반생산기관으로 치열한 경쟁 활동을 펼쳤는데 백영호는 미도파레코드사의 문예부장으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가수를 발굴했다. 미도파레코드사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백영호의 눈부신 활동 덕분이다. 미도파의 업무가 워낙 과중해지자 빅토리레코드란 이름의 계열회사를 차려서 백영호는 그 운영자로 부임했다. 방운아, 백설희, 박애경, 정향, 신해성 등이 그 시절 백영호와 함께 일하며 히트곡을 발표했던 가수들이다.

이 시기 백영호 최대의 대표곡은 단연 ‘추억의 소야곡’(남인수 노래)일 것이다. 중증결핵을 앓고 있던 가수 남인수로 하여금 마이크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의 창법으로 녹음을 완성시켰던 백영호의 포부와 의지를 이 작품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전속 가수로 선발은 되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가수 방운아에게 ‘마음의 자유천지’(손로원 작사)를 취입시켜 히트곡을 만든 인물도 백영호였다. 평북에서 내려온 실향민가수 손인호에게 백영호 작곡의 ‘해운대 엘레지’는 최대의 성공작이었다. 

1960년대에는 이제는 전설이 된 노래 ‘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황포돛대’, ‘여자의 일생’, ‘울어라 열풍아’, ‘임금님의 첫사랑’, ‘서울이여 안녕’, ‘잊을 수 없는 여인’ 등의 노래를 모두 이미자와 함께 했다. 

이어서 남상규의 노래 ‘추풍령’(남상규)도 크게 히트시켰다. 1970년대에는 ‘비 내리는 명동’(배호), ‘아씨’(이미자), ‘여로’(이미자), ‘동숙의 노래’(문주란)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출시하는 노래마다 히트곡이 되었으니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그를 능가할 작곡가는 아무도 없다.

가장 밀접한 콤비로 활동했던 가수는 단연 이미자이다. 그녀의 노래 중 백영호 작곡으로 발표한 작품은 무려 100곡이 넘는다. 콤비 작사가로는 한산도(본명 한철웅)가 있다. 백영호는 자신의 음악 생애 55년 동안 4000여 곡을 발표했고 이 중 크게 히트한 곡만 100편이 넘는다. 유족들이 보관 중인 미발표곡 악보까지 합친다면 5000곡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곡가 백영호의 주옥같은 노래를 들으며 활기찬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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