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버치 중위가 말하는 ‘해방 직후 한국 & 한국인’
[신년 특집] 버치 중위가 말하는 ‘해방 직후 한국 & 한국인’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12.31 13:15
  • 호수 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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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무시하지 마라…그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국인은 어떤 삶을 살았나. 당시 한국은 미군정의 통치 하에 있었다.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함께 한국 내정을 담당했던 하버드대학 법학전문대학 출신의 레너드 버치 중위. 변호사로 활동하다 1945년 12월 한국에 배치된 그는 계급이 중위에 불과했지만 하지와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30대 중반의 버치는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거물이 됐다. 그는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그의 기록은 ‘버치 보고서’란 이름으로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에 보관됐다. 버치 보고서를 비롯 그의 일일수첩과 편지 등을 통해 당시의 한국과 한국인의 삶을 조명한다. 이 기사는 ‘버치문서와 해방정국’(박태균·역사비평사)에서 발췌했음.


  미군정 핵심 인물 버치 중위, 동향 파악해 상부에 보고한 기록

  일본 통치 하에서 자존감 지켰지만 산업적으로 발전하지 못해

 ‘장비도 없이 모든 옷을 하얗게’…세탁 실력 뛰어난 ‘白衣 민족’

레너드 버치 중위. 해방 직후 한국에 설치된 미군정에서 한국 정치인들의 동향과 서민의 일상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담당했다.
레너드 버치 중위. 해방 직후 한국에 설치된 미군정에서 한국 정치인들의 동향과 서민의 일상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을 담당했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한국인은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린다. 아일랜드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유머 센스가 많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주장이 많다. 공상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설화들이 있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파티와 휴가, 정치권력을 사랑한다. 정신적 수준이 높으며 동시에 그러한 높은 수준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매우 획일적이며 중국인과 다르며 일본인도 아니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내려왔으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양의 기준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

해방은 됐지만 정치는 혼란했고 사회적 안전은 전혀 담보되지 않았으며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미군은 군사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서울에 주한미군정청을 두고 각 도에 군정단이 파견됐다. 군정단 아래에 군정 중대를 두어 각 시와 군에 파견했다. 군정단은 대체로 장교 13명과 사병 26명, 군정 중대는 장교 12명과 사병 60명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의 수로 도·시·군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군정은 돈도 부족했다. 일본인이 돌아간 이후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세금을 걷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통치를 해야 했고 직원들 월급을 주어야 했다. 돈을 마구 찍어내 물가가 1년 사이에 100배가 넘게 상승하는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이 계속 됐다. 

북쪽은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았다. 소련군의 지원 하에 권 력을 장악한 38선 이북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경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식민지 시기 더 많은 산업시설이 북쪽에 있었고 수풍댐과 비료공장이 있었다. 인구도 남쪽보다 적었다. 

버치문서에 의하면 당시 은행 이자는 월 10%였다. 정치인 중 한 사람은 원금 125만엔에 대한 이자로 매달 그 10%인 12만5000엔을 받고 있다고 했다. 125만엔을 넣어놓으면 1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275만엔이 되는 것이다. 

콜레라로 5500명 사망

한국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였다 정치에 관한 것은 ‘통일되고 독립된 한국 정부의 빠른 수립’이었다. 그 외 ‘김일성의 암살이 사실인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승리한 서윤복’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국민은 대부분 일제로부터 해방됐건만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다는 느낌이었다.

버치가 작성한 일일수첩에 콜레라에 대한 메모는 충격적이다. 1946년 7월 13일, 콜레라로 5500명 사망. 1938년 이래 최악의 전염병이 돌았다. 미군정은 한국이 비위생적이고, 일본인 의사가 떠난 이후로 조선인 의사가 부족해 콜레라가 창궐했다고 분석했다. 

해방 직후 소풍나온 아이들의 모습. 		사진=부경근대사료 연구소
해방 직후 소풍나온 아이들의 모습. 사진=부경근대사료 연구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이 책자에 “한국은 흥미롭고 4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일본의 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은 자존감을 지켰지만 산업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낮은 생활 수준과 교육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이 기술의 부족과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만들어냈으며 이것이 미군정이 직면해야 하는 어려움의 원천이 됐다”고 밝혔다.

한국서의 불편함은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 전기로 작동하는 요리기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고도 없이 언제 전기가 나갈지 모른다. 급할 때는 한국의 화로를 써야 하는데 생각보다 꽤 효율적이다. 어릴 적 방안에 난방을 하면서 물도 끓이고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도 구워먹었던 화로라고 소개한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서부시대 오두막집에서 사용했던 화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책자는 한국인의 세탁 솜씨를 극찬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처럼 배우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배운 것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적용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한국인들의 세탁 실력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하얀 옷의 민족’이다. 특별한 장비도 없이 옷을 하얗게 유지시킨다. 바위에 놓고 때리거나 빨래판에 놓고 굴리는데 옷과 신발이 모두 하얗게 된다.

비위생적이지만 자존감 높아

한국의 비위생적인 부분을 조심하라는 부분도 있다. 미 육군에서 승인한 물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물은 마시고 양치질 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특히 조리되지 않은 한국의 해산물은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 모든 주거지는 DDT를 우선 뿌려야 한다. 특히 질병을 옮기는 파리를 조심해라. 다행히 말라리아는 많지 않다. 그래도 모기망을 이용하고 옷을 입고 자야 한다. 미군들에게 수영은 모든 곳에서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애들이 맨발로 놀지 못하도록 해라. 십이지장충병에 걸릴 수 있다. 

한국의 기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덥고 습도가 높은 여름날씨, 춥고 매우 건조한 겨울날씨를 유의하라고 알려주고 있다. 서울의 기후는 미국 아이오와주의 디모인과 유사하다고 적고 있다. 

버치의 문서 중 남한 정치 세력에 대한 종합 보고 중 도별 정치 상황 기록도 흥미롭다. 

충청북도는 ‘한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이다.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충청남도는 ‘한국의 시카고’였다. 모든 철도가 대전에서 만난다.

경상북도는 미국적 도덕관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반미 감정이 강하다. 

경상남도 부산은 다른 도시보다 깨끗하고 옷이 더 멋있다.

전라남도는 가난한 지방이다. 우익이 40%, 좌익이 60%이다.

제주도는 30만 인구의 90%까지 좌익이라 큰일이다. 

이 책자는 끝으로 “위생적이지 않고 교통이 불편하다고 이들을 무시하지 마라. 그 나라는 나름의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다”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미군정은 실패로 끝났다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외국군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단한 삶을 살던 한국인들의 고뇌와 한국의 풍습을 버치 중위는 나름의 애정 어린 눈으로 기록했다.

끝으로 버치의 문서를 종합해 보면 한국에 대한 미군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가 ▷미국 본국의 소극적 지원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한국인들의 태도 특히 미국을 지지할 것으로 예측했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의 비협조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 등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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