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광화문’ 전, 현대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광화문’이 있었다
‘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광화문’ 전, 현대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광화문’이 있었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2.01.10 13:58
  • 호수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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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4‧19혁명과 2002한일월드컵, 촛불문화재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요 사건을 함께한 광화문의 변천사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한 관람객이 전시장을 돌아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번 전시에서는 4‧19혁명과 2002한일월드컵, 촛불문화재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요 사건을 함께한 광화문의 변천사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한 관람객이 전시장을 돌아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자료·사진·영상 통해 광장의 변모 조명

이순신 장군 동상과 고층빌딩숲이 들어선 배경 등 사연 흥미진진

[백세시대=배성호기자] 4·19혁명, 6·10민주항쟁, 2002   한·일월드컵,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그리고 촛불문화제까지.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이 굵직한 사건에 늘 함께했던 ‘공간’이 있다. 조선시대 법궁이자 현재는 세종대로 사거리까지 뻗은 공간을 포함한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光化門) 이야기다. 광화문 일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광복 이후 77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대한민국 대표 상징공간’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일대의 변화상을 재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려 주목받고 있다. 화제의 전시는 광화문 한편에 자리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오는 3월 1일까지 진행되는 ‘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광화문’ 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순신 동상 모형, 시민회관 개관 당시 소책자,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명패, 캐슬린 스티븐슨 전 주한 미국대사 구술 등 다양한 자료·사진·영상 등 250건의 자료를 통해 광화문의 변모 과정을 살펴본다. 이번 전시는 시간순으로 4부로 구성됐다. 먼저 1부 ‘다시 찾은 광화문’에서는 광복 이후 광화문 거리가 한국 현대사 출발의 중심이었음을 살펴본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위해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운 후 광화문(현 위치)을 해체해 경복궁 동문 북쪽으로 강제 이전시킨다. 그리고 이 거리를 ‘광화문통’이라고 불렀고 세종로 사거리에서 태평로로 연결되는 길에 식민지 통치기관이 집결되면서 광화문은 식민 권력의 상징이 됐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치면서도 일제에 의해 연출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고도 한동안 제대로 된 재건 작업조차 진행되지 못하다 4·19혁명을 기점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담아내는 광장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전시에서는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고 조선총독부를 짓는 사진 등을 통해 광화문의 수난사를 소개한다.

이어지는 ‘광화문 거리 개발과 건설’에서는 경제개발을 위한 정치·행정 중심기관 건설과 함께 국가행사의 중심 무대가 됐고 유동인구와 차량 증가 속에서 광화문 거리의 현대적 기반이 마련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번 전시에서는 4‧19혁명과 2002한일월드컵, 촛불문화재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요 사건을 함께한 광화문의 변천사를 재조명한다. 사진은 한 관람객이 전시장을 돌아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 사진에서 광화문 뒤편에 일제의 대표적인 잔재이자 현재는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세종로에 국가 행정기관을 밀집시킨다. 세종로의 도로폭이 확장되고, 지하보도와 육교가 건설되면서 광화문 거리는 점차 자동차 중심의 공간으로 바뀐다. 이는 세종로 공사 현장과 버스와 자가용차로 가득한 1980년대 세종로 사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배경도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1964년 세종로 중앙에 애국선현 동상 37개가 설치됐으나 내구성이 약해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여론에 밀려 1966년에 철거됐다. 이후 1968년 4월 17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종로에 세워졌다. 세종로와 태평로가 뚫려 있어 남쪽의 일본 기운이 강하게 들어온다는 풍수지리학자의 주장을 배경으로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을 동상으로 정한 것이다.

3부 ‘광화문 거리의 현대적 재구성’에서는 남북간 체제 경쟁, 강남개발, 도심재개발, 1980년대 올림픽 유치 속에서 진행된 광화문의 현대적 건설을 설명한다.

1980년대 올림픽 유치는 도심부 전면 재개발과 함께 광화문 거리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정부 주도로 세계적 선진 도시에 어울리는 도심부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기 위한 정책이 추진됐고 그 과정에서 광화문 일대의 오래된 주택과 식당, 명문 학교와 학원, 출판사와 서점, 중소형 건물 상당수가 강남 및 주변 지역으로 이전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중대형 고층건물이 들어서게 됐고 현재와 같은 공간이 형성됐다.

마지막 ‘광화문 공간의 전환’에서는 광화문 거리의 역사적 상징화 작업과 2000년대 광화문 공간의 주체가 국가에서 시민으로 변화되는 모습, 광화문 광장의 출현을 소개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문민정부 출범,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제도 실시 등 사회 변화는 광화문 일대 공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광복 이후 박물관으로 활용됐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이에 발맞춰 광화문도 복원됐다. 민주화 이후 광화문 일대에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1998년 공원 형태의 시민열린마당이 개장됐다. 

광화문은 월드컵 응원과 같은 국민적 축제를 함께 즐기는 무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정치적 시위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오랫동안 억눌렸던 시민들이 소통하는 장으로 특유의 활력을 되찾게 됐다. 월드컵 응원, 대형 종교집회, 정치적 시위, 촛불집회 등 중요 역사 현장을 포착한 사진들은 이러한 광화문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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