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분홍색 거짓말 / 이호선
[백세시대 금요칼럼] 분홍색 거짓말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22.02.14 11:03
  • 호수 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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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나이가 들면, 알면서 들어주고

한바탕 웃음 일으키는

빨갛지도 하얗지도 않은

분홍색 거짓말이라도 해서

노년의 삶, 재미있게 살았으면

나이가 들면 지혜와 경험이 는다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꼼수와 뻔뻔함만 느는 사람도 있다. 딸의 상견례 자리에서 아버지는 친구 전화를 받으며 “내 딸은 박사고, 사위는 장교야”라고 했으나, 사실 석사과정 중이었던 딸과 군 부사관이었던 사위는 면전에서 벌어진 일을 참지 못하고 결국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새삼 이 나이에 바로 탄로가 날 이 거짓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기야 우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며 커왔고, 립서비스까지 포함한다면 지금도 적게는 하루 10개에서 많게는 200개가 넘는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 해도 주변에 거짓말쟁이는 따로 있다. 특히 주변에 보면 사소한 일들에 대해 두루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부풀리고 과장하고 가끔은 거짓말을 적절히 섞어 나름 조합을 하기에, 범죄라고 하기엔 가볍고, 그렇다고 인정하기엔 부담스럽다. 다행인 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짓말쟁이를 보다 쉽게 가려내는 능력을 경험을 통해 갖게 됐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거짓말은 습관이고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란다. 거짓말 하나를 유지하는데 다른 36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지만, 분명한 건 거짓말이 주는 매력이 있다. 자신을 크게 보이고 타인의 인정을 유도한다. 

단, 들키지 않을 때 그렇다. 처음엔 허풍과 거짓말이 잘 통하고 무사히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거짓과 진실 사이를 넘나들면서 들통이 나면 얼른 또 다른 거짓말로 넘겼을 것이다. 

남도 하고 나도 하는 그 거짓말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 거짓말은 주로 색깔로 나타나 빨간색은 진저리칠만한 악당의 말이고, 하얀색은 기꺼이 사용하는 치료의 묘약이자 돌봄의 희생과 같다. 하얗건 빨갛건 나이가 들면 거짓말을 좀 했으면 좋겠다. 누구를 해치지 않고, 바로 드러나기도 쉽지 않으며, 한바탕 웃음이나 피식 웃는 입꼬리로 사라져버리는 휘발성 거짓말, 바로 그 말!

‘내가 젊어서는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그저 확인할 수 없는 과거의 무용담들은 빨갛지도 하얗지도 않은 분홍색 딸기우유 거짓말이다. 

근육은 빠지고 잠은 줄고 뼈도 약해진다지만, 나이가 들어 뼈대만 남아있던 기억들은 살이 붙고 생명을 얻어 거대한 역사가 되고, 이내 기억의 주인공은 호기어린 영웅이 된다. 

그런 노인들의 무림고수 시절 이야기는 대개 과장되고, 때로는 왜곡시키고, 알면서도 비틀어 이야기하며 허풍을 불어넣고 허세를 부려야 이야기가 나름 재미가 붙는다. 마치 변사가 7일장에 선 무대 배우들의 절절한 사랑과 권선징악의 거대 서사를 목소리로 풀어내며 상상의 바람을 불어넣듯 말이다. 지난 권력이 살아나 삼국지 관우와 장비가 살아 돌아온 듯 잊혀진 과거에 숨을 불어넣으니 곧 노인은 사라지고 젊은이가 기세등등하게 나타난다. 

듣는 이들마다 알고 있다. 군화만 신으면 태권도 유단자가 된다는 남자들 유머 마냥, 거품 같은 허풍과 평생 읽은 소설을 다 퍼다 올린 구운몽같은 몽환, 변사 뺨치는 거들먹거리는 말투 하며, 손발을 휘두르며 자세까지 취하는 액션까지 모두 총동원되는 삼류서사라는 것을 모두 안다. 

그러나 허풍떨 관객이 있으니 좋다. 들먹일 과거마저 소재가 되니 좋다. 들어주지 않는 시시한 삼류 배우 인생일망정 이렇게 주인공이 되어보니 좋다. 한차례 쏟아내면, 다음 연사가 다른 서사를 시작할 테니 바통을 넘기는 것마저 좋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다 거짓말 공범이다. 알면서 들어주고, 이어받아 내 차례가 되면 질세라 앞사람 못지않은 허풍을 쏟아내니 말이다. 남들 허풍에 같이 웃어주고 내 소설은 채 말하지 못하는 그에게는 기억과 상상이 합쳐지며 머릿속 서사가 이어진다. 

그러니 빨갛다고 하기에는 기억과 의도가 선하고, 하얗다고 하기에는 자기중심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생생한 기억과 선한 의도, 적절한 허풍에 오롯이 나만이 주인공이 되는 이 오묘한 장르를 분홍색 거짓말이라고 하자.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짠 듯 자리를 지키며 버텨주는 이 서사, 이기성과 이타성이 공존하는 이 난장(亂場)을 그렇게 불러보자. 내일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이 난장의 장르를 펼치러 나가보자. 자, 무림의 고수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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