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홍제역의 슈바이처’를 아시나요”
[백세시대 / 세상읽기] “‘홍제역의 슈바이처’를 아시나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2.28 14:34
  • 호수 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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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자기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자기가 사는 동네나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이도 드물다.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훌륭한 인물, 의미 있는 장소를 찾지 않는 ‘자기 홀대’의 습성이 있다. 기자는 최근에 겪은 일들을 반추하던 중 우리 동네야말로 세상에 드러내 자랑할 만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는 백내장이었다. 2년여 전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눈이 흐릿하게 보였다. 집에서 마을버스로 10여분 걸리는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홍제역. 도로 양쪽으로 즐비한 병원 중에서 낡은 건물 4층에 위치한 ‘이정근 안과’란 간판을 발견했다. 검사 결과 백내장 초기였다. 일제 약물로 임시 처방만 받다가 눈에 자꾸 이물질이 끼는 것 같아 수술을 결정했다. 

이정근 원장(전 대한안과학회 회장)은 “여기선 수술을 안 하고 백내장 수술을 잘 하는 병원이 미아리에 있는데 그곳에 (수술)예약을 잡아주겠다”며 자상하게 병원 약도를 그려주고 수술비용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 병원 의사가 나와 함께 미얀마에 의료봉사를 같이 가는 젊은 의사로 수술을 아주 잘 한다”고 했다. “나도 백내장 수술을 할 때는 그 의사한테 받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 원장의 말 중 ‘미얀마 의료봉사’란 단어가 귀에 솔깃하게 들렸다. 나이 지긋한 ‘동네의사’가 해외의료봉사라니…. 신선한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 신뢰감, 존경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에 한 번씩 병원 출입구에 ‘휴진’ 쪽지가 붙어 있었고, 사전에 모르고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이 원장은 미얀마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것이다.  

이 원장은 서울남산라이온스클럽회원으로 30년 가까이 국내외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해오고 있다. 남산라이온스클럽은 1964년 8월 속초·화진포의 무료개안수술을 시작으로 코로나 발생 직전까지 전국의 무의촌을 다니며 총 56회에 걸쳐 진료 3만9367명, 수술 5316명이란 놀라운 봉사기록을 남겼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중국 연변, 네팔, 미얀마 등 해외에서도 개명의 봉사가 이뤄졌다. 이 클럽은 독거노인, 불우이웃, 시설 등 소외 계층을 돕는 일에도 앞장 서 왔다. 

이 원장은 코로나 발생 전인 지난 2019년 8월, 미얀마 미찌나에 의료봉사단장으로 20여명의 단원을 이끌고 일주일간 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 원장은 “여름 휴가철에 대학병원의 안과의사들, 간호사 등 최고의 의료진이 고가의 장비를 가지고 가 며칠 동안 숙식하며 수백 명의 환자들을 치료한다”며 “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들이 구름처럼 병원 앞에 몰려드는 등 마을 전체가 활기를 띤다”고 말했다. 

출국 준비도 만만치 않다. 수술현미경이 붙은 수술대 4대(대학병원 수준)와 의약품 등을 컨테이너에 싣고 통관을 거치고 의료진의 임시면허증 취득, 현지 호텔 예약 등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일이 꼬이기도 한다. 

백내장을 앓는 미얀마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들로 경제 사정 때문에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18년 6월, 미얀마로 떠난 봉사팀은 12명의 현지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4일 만에 1300명의 환자를 검진하고 308명을 수술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봉사단은 수혜자들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한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거주하는 전첨화는 “못 파편에 왼쪽 눈을 다쳐 병원을 찾았으나 인공수정체가 없어 2년여 보지 못한 채 지내던 중 봉사단을 만나 수술을 받고 시력 0.4를 되찾았다”며 “새 광명을 찾아주신 한국 남산 사자회 여러분 선생님과 의료 일꾼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보내왔다. 

기자의 홍은동 집 가까이 있는 절에서 종교계의 작은 행사가 있었다. 조계종 산하 도선사가 도시인 대상의 포교 목적으로 설립한 현성정사 4층 대웅전에 최근 열반한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탁닛한 스님의 분향소가 차려져 불교도와 일반인들이 참배를 다녀간 것이다. 이 절 뒤편에 있는 대통령을 배출한 ‘문재인 빌라’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홍제역의 슈바이처’ 병원이 있고, 종교계 이슈의 중심이 되고,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가 살던 곳이 바로 기자가 사는 동네이다. 

한 번쯤 마을 사람들과 동네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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