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예쁜 풀 화단’의 탄생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예쁜 풀 화단’의 탄생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2.02.28 14:39
  • 호수 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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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18세기까지 정원의 주인공은 물

 나무는 울타리 정도의 보조 역할

 

 로즈마리 등 예쁜 풀로 가득한

‘영국의 시골정원’이 인기 끌며

 서양 정원에 엄청난 변화 일어나

뭔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정원에서 ‘식물’이 주인공이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 정원의 주연은 뭐였냐고 묻는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이다. 우리의 담양 ‘소쇄원’이나 보길도 ‘세연정’과 같은 전통 정원이 모두 자연 계류를 이용해 물길을 연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양도 분수와 연못, 수로를 만드는 일이 우선이었고, 식물은 울타리 혹은 공간을 분할하고 형태를 만들어주는 역할일 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식물 중에서도 딱딱한 목대를 지닌 나무만이 이용됐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서양 정원엔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본격적인 시작을 역사적으로는 ‘영국의 시골정원’(English cottage garden)으로 본다. 마차를 타고 돌아야 할 정도로 큰 부지를 지닌 귀족과는 달리 시골 서민들이 만든 정원엔 큰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풀들과 예쁜 꽃을 피우는 ‘풀’이 뒤섞인 일종의 ‘예쁜 풀 정원’이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의 아내 이름은 ‘앤 해서웨이’이고, 이 이름을 따서 ‘앤 해서웨이 코티지 가든’이라 부르는 정원이 있다. 스트랫퍼드 에이번이라는 중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 외곽에 있는 이 셰익스피어 처가 정원은 정작 셰익스피어 생가보다 인기가 많다. 이곳에는 초가가 있고, 그 앞 정원에 감자, 금잔화, 콩, 장미, 완두콩, 로즈마리가 특별한 형식도 없이 뒤엉켜 자라는데 이게 바로 정형적인 ‘예쁜 풀 정원’의 모습이다.

이 정원이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골에서 자생한 이 ‘예쁜 풀 정원’은 처음엔 귀족들의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조차도 점점 이 풀 정원에 빠져들었다. 

그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저택에 있는 과시적인 귀족 정원을 없애고, 직접 가꾸고 관리하는 시골의 풀 정원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많은 글을 통해 이 자연스러운 풀 정원이 얼마나 정서적, 육체적으로 우리에게 좋은지를 알리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이런 예쁜 풀 정원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전문 디자이너가 나타나면서 정원문화는 한 획을 긋게 된다. 화가이자, 자수 전문가였던 거트루드 지킬은 이 풀 정원을 예술적으로 구사하는 노하우를 제시하면서 ‘다년생 초본화단’(Herbaceous border)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식물의 조합을 마치 화가가 여러 색을 혼합시켜 화폭을 아름답게 만들듯 식물을 활용해 다양한 색과 질감, 형태로 연출했다. 그녀의 디자인은 당시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00여 개가 넘는 거트루드의 정원이 유럽, 미국 등에 나타나면서 정원이 사회적 현상으로 바뀌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정원이 귀족의 전유물에서 서민의 문화로 바뀐 계기가 됐고, 정원이 남성 정치인들의 회합장소였던 목적에서 여성의 패션 생활문화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면서 다양한 초본식물과 정원용품, 정원 패션 등이 개발돼 산업적으로는 원예시장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은 이 거투르드식 초본식물 화단에서 좀 더 발전한 형태의 ‘새로운 초본식물 화단 운동’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중이다. 이는 미국 초원에서 스스로 자생하는 야생종을 이용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미국에서 비롯된 이 새로운 초본식물 화단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예쁜 풀 화단’은 식물에 대한 공부가 필수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존이 가능한지, 각기 다른 식물은 언제, 어떤 모양과 색으로 피어날지, 여러 풀들의 혼합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등의 꼼꼼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가든디자이너 입장에서 ‘예쁜 풀 화단’은 분명 유럽이 그랬듯 우리의 정원문화에도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본다. 하지만 분명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은 추위가 발목을 잡지만 땅이 조금씩 들썩거린다. 풀들이 딱딱한 흙을 들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잔뜩 온몸을 웅크린 채 휴대폰만 보던 푹 숙인 고개를 화단으로 한 번 돌려보자. 그러면 예쁜 풀들이 너무 열심히 봄을 준비하고 있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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