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손주보다 기억력이 나쁘다고?”
[백세시대 / 세상읽기] “손주보다 기억력이 나쁘다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3.14 10:50
  • 호수 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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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 살던 딸 내외가 한 달간의 휴가를 맞아 한국에 들어와 기자의 집에서 지낸다. 딸은 8세, 6세 된 남매를 뒀다. 기자는 손주들이 매년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눈여겨본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 할아버지가 어떻게 비쳐지는가도 유심히 살핀다.

하루는 거실에서 TV를 통해 영화 ‘듄’(Dune)의 주요 장면들을 모은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1970년대에도 동일 제목의 영화가 히트한 적이 있다. 최근 티모시 살라메라는 미국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시 화제가 됐다. 이 배우의 눈빛과 헤어스타일 등이 맘에 들어 그와 관련된 프로들은 뭐든지 보고 싶었던 차라 화면에 몰입했다. 

손주가 슬그머니 다가와 “스파이더맨이 보고 싶다”고 했다. 리모컨을 받아든 손주는 유튜브에서 빠져나와 넷플릭스로 들어가더니 검색창을 찾아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했다. 초등학생이 리모컨으로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조합해내는 속도가 놀라웠다. 할아버지는 분명 손주보다 빨리 찾지 못할 것이다. 그 과정이 귀찮아 언제부턴가 기피해왔다. 물론 젊었을 적에는 번거롭게 느낀 적이 없다. 

넷플릭스에는 스파이더맨 영화 총 6편이 올라가 있었다. 손주는 모든 영화를 보았고 그 가운데 주인공이 같은 영화도 골라냈다. 기자는 손주가 스파이더맨을 정말 좋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손주가)아주 똑똑해요, 기억력이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아이들이라서 노인보다 기억력이 좋고, 노인은 상대적으로 기억력이 나쁜 건가. 

노인에 대한 보편적이고 부정적인 편견이 글로벌한 인식이 됐다. 노인들은 건망증이 심하고 행동이 굼뜨며 약하고 소심하며 자기 방식에 갇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다.  최근 하버드대학의 엘렌 랭어라는 여성 심리학과 교수가 펴낸 책 ‘늙는다는 착각’(유노 북스)에는 노인의 기억력과 관련해 재밌는 부분이 있다. 

노화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판단하기 위한 연구 분석에서 메리 카이트와 블레어 존슨은, 사람들에게 노인들이 지닌 신체적인 매력이나 정신적인 능력의 평가를 요구했을 때,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가장 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실제로 노인이라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열등하지 않았음에도 편견과 잘못된 인식으로 ‘노인이니까 그런 거다’고 결론을 내린다는 말이다.

두 사람의 연구에서 드러난 또 다른 사실은 노화에 관한 부정적인 편견이 상당수 무의식적이거나 반사적인 과정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이다. 이 하버드대 교수는 책에서 “‘할머니’라는 말이 늙은 사람을 의미하며, 우리들 대다수가 처음으로 늙는다는 개념을 접하게 만드는 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그는 “우리 할머니는 나이뿐만 아니라 정신 능력 면에서도 상당히 젊으셨다고 기억한다”며 “늙음에 대한 나의 견해-나는 노화 과정에 긍정적인 편이다-는 그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부모가 노년에 대한 편견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의도치 못한 사이 우리는 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한계에 대한 과장된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손주가 스파이더맨 주인공들을 모두 기억하듯 기자는 티모시 살라메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을 기억한다. 그의 의상과 미세한 표정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어떤 특정한 표정 연기를 그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엘렌 랭어 교수는 “어떤 목록이 ‘게임보이’ 같은 용어로 이뤄졌다면 당연히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능가할 것이다. 반면 ‘마작’ 같은 낱말로 구성되었다면 노인들이 쉽사리 젊은이들을 이길지 모른다”고 말했다. 관심사에 따라 기억력이 다르게 작동하는 것일 뿐 나이와 상관없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건망증은 애초에 학습할 가치가 없는 정보였다거나 오히려 현재에만 열심히 집중하는 능력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될지 모른다”며 “천천히 운전하는 것 또한 운전의 위험에 관해 축적된 지혜를 반영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검색창을 통해 영화 제목을 찾는 속도가 손주보다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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