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벚꽃에 대한 단상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벚꽃에 대한 단상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2.03.14 10:55
  • 호수 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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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가수 김정구가 부른 ‘앵화폭풍’은

일제 때 창경원 밤 벚꽃놀이 묘사

밀고 당기는 북새통을 그리면서

군중들을 ‘혼나간 범나비’라며

질타하는 교훈적 내용 담아

드디어 봄입니다. 곧 꽃소식이 남녘에서부터 올라오겠지요. 높은 공중에서 보면 단풍은 북에서 내려가고 꽃은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갑니다. 가히 꽃들의 릴레이 경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나라 삼천리강토는 온통 봄꽃들의 화려한 잔치가 펼쳐집니다. 

일찍 피는 꽃들 중에는 벚꽃이 으뜸입니다. 여러 지역에서는 화려한 벚꽃축제도 열리지요. 오늘은 벚꽃과 관련된 노래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938년 오케레코드사는 ‘앵화폭풍(櫻花暴風)’이란 노래가 실린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가수 김정구가 걸쭉하고 구성진 음색의 만요 스타일로 불렀지요.

낮에도 사꾸라 밤에도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혼 나간 범나비 너울너울 너울너울/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영감 상투는 삐뚤어지고/ 마누라 신발은 도망을 쳤네/ 영감 마누라 꼴 좀 보소/ 어헐싸 흥 꽃이로구나/ 싱긋벙긋 껄껄 웃는 꽃이로구나 (가요 ‘앵화폭풍’ 2절)

앵화(櫻花)는 벚꽃입니다. 사꾸라(さくら)는 벚꽃의 일본말입니다. 가사에는 1922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창경원 밤 벚꽃놀이’의 풍속도가 실감나게 담겨 있습니다. 창경원은 원래 조선왕조의 유서 깊은 창경궁(昌慶宮)이었는데, 1909년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경략하기 시작한 일제는 조선왕조 궁궐의 전각을 마구 헐어내고 그 자리에다 동물원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통로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왕벚나무 묘목을 1000그루나 심어서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벚꽃 길을 조성했습니다. 식민통치자들은 매년 봄이면 이른바 ‘벚꽃 하나미(花見)’ 행사를 열었는데 이 꽃놀이 행사는 맨 처음 일본인 중심으로 하다가 1924년부터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공개하는 ‘창경원 야앵회(夜櫻會)’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밤 벚꽃놀이였지요.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무렵이면 이 행사를 보려고 전국에서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창경궁 일대가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고 합니다.

일단 노래 가사의 여러 대목에서는 그 행사를 보러온 인파의 밀고 당기는 북새통과 아우성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란 대목에서 우리는 당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며 당기는 현장의 모습과 아우성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늙은이 젊은이가 한자리에 모여서 우글우글하다며 대혼란의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같이 창경원 벚꽃구경 간답시고 남녀노소 제각기 새 나들이 복장으로 외양을 뽐내고 있습니다. 처녀들은 고급 갑사댕기로 멋을 내고, 총각들은 새로 개발된 값 비싼 인조견 조끼를 입고 있네요. 

그런데 그 외모가 밀고 당기고 잡고 놓는 뒤범벅 속에서 본연의 매무새는 다 ‘구겨지고, 삐뚤어지고, 도망치고, 찌부러지고, 찢어져’ 영 꼴이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요, 앞뒤 순서가 무질서하게 뒤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정상적 시간과 분별, 순리를 상실해버린 지 오래라 혼란과 파탄, 무질서와 냉혹한 현실만 그들 앞에 내팽개쳐져 있을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몽매한 대중들을 향해 매섭게 한방 먹입니다. 그 얼빠진 속중(俗衆)들의 꼴을 ‘혼나간 범나비’로 풍자하고 있군요. 모두들 영혼이 빠져 달아난 무지하고 몽매한 바보들의 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래가사 전체를 음미해 보노라니 ‘사꾸라’라는 말이 보통 이상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일제는 사꾸라 꽃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활용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일제는 젊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의 꽃으로 써왔지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른바 자살특공대였던 카미카제 병사들을 피어있는 사꾸라 꽃에 비유했습니다. 카미카제 병사들이 타고 출격하는 전투기에는 벚꽃을 새겼고, 떠나는 병사들을 전송할 때 여학생들은 사꾸라 꽃을 꺾어서 병사들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병사들의 죽음을 가리키는 ‘산화(散華)’란 단어도 매우 소름끼치는 낱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단어에서 화(華)는 바로 사꾸라 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꾸라’의 또 다른 뜻으로는 사기꾼, 남을 속이는 사람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장사치 혹은 야바위꾼들이 고객을 끌기 위해 손님으로 가장시켜 물건을 사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부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치판에서 이 ‘사꾸라’라는 말이 나쁘게 변질돼 사용되기도 하지요.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존경받을만한 기본위상에 값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가려서 실행하는 그야말로 책임 있는 세대들의 냉정한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곱게 늙는다’라는 말은 분명 인격에서 덕망의 향내가 풍겨나는 듬직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앵화폭풍’이란 노래는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올바른 자세를 매섭게 일깨워주는 교훈적 가치를 지니며 새롭게 다가옵니다. 벚꽃을 보면서도 우리는 시대가 주는 이런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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