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공모 ‘나와 경로당 이야기’ 1등 수상작] ‘모과처럼 정이 익어가는 경로당’
[백세시대 공모 ‘나와 경로당 이야기’ 1등 수상작] ‘모과처럼 정이 익어가는 경로당’
  • 장명익 대구 달성군 남해오네뜨2차경로당 회장
  • 승인 2022.04.18 09:19
  • 호수 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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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 이사 와서 경로당에 들어섰을 때 70대 끝자락이었다…”

[장명익 대구 달성군 남해오네뜨2차경로당 회장] 이른 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다. ‘이런 날은 군것질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며 경로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를 본 회원들이 웃음으로 맞으며 말한다. “회장님, 비도 오는데 부침개 해먹어요. 감자랑 고구마도 삶을까요?”

“좋지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몇이 주방으로 향하고 나도 냉장고에서 재료를 챙겼다. 부지런한 회원들이 빈터에 채소밭을 일궈 골라온 감자, 고구마, 호박, 양파들이다. 팬에 자글자글 익어가는 부침개 냄새와 왁자지껄 차려낸 한상차림에 정이 몽글몽글 솟는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아직 속잎이 돋아나지 않은 모과나무는 신나게 목욕 중이다. 정자 옆에 우뚝 선 모과나무는 언젠부턴가 경로당 소속이 됐다.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개수를 세어가며 눈맞춤했고, 가을이 와 노랗게 익으면 경로당의 모과 추수가 시작된다.

부회장님이 긴 장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모두 목을 젖혀 눈으로 장대 끝을 따라간다. 모과가 장대에 걸려 내려오면 서둘러 줍는 손맛에 다들 아이들처럼 좋아한다. 수확을 마치면 못난이 모과를 손질해 병마다 담는다. 그렇게 숙성된 모과차는 겨우내 경로당 약차로 쓰인다. 감기는 끄떡 없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회원들은 다시 열릴 모과에 기다림을 내건다.

6년 전 낯선 곳으로 이사 와서 단지 안을 서성이다가 경로당에 들어섰을 때 내 나이 70대 끝자락이었다. 친구들이 경로당에서 소일한다고 들었지만, 아는 이 없는 곳에 선뜻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로당은 어느새 나의 보금자리가 됐다. 발을 들이기 수줍어하던 회원에서 총무를 거쳐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참 고마운 공간이다. 회원들의 인심이 모과약차처럼 은은하게 내 안에 스며들어서 경쟁하지 않아도, 조심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들켜도 부끄럽지 않은 이곳이 참 좋다.

우리는 청주댁, 창녕댁 같이 각자 전에 살던 동네의 지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오늘은 입심 좋은 목포댁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내가 시집살이할 때 시어머니 세 분을 모셨데이. 시아버지 부인이 셋인데 여기저기 눈치보느라 얼매나 속을 끓였는지. 아이구, 무시레이.”

“시아부지가 참 능력이 대단했는가배.”

상주댁의 한마디에 우리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거는 아무것도 아이다. 우리 신랑이 첩을 두고 딴살림을 차렸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내 집에 불러들여 같이 살았네. 아이구 내 팔자야. 그 영감도 저세상으로 가버렸지.” 

비산댁의 푸념이다.

“와 그랬노. 옆에 두고 보면 더 속상할낀데.”

위로해줘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또 까르르 웃어댔다.

“됐다 마. 치우고 한 판 붙자.”

그렇게 10원짜리 민화투 멤버 네 명이 자리를 잡았다. 우호적으로 진행되나 싶더니 갑자기 “투다닥,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이미 화투판이 공중을 날고 있다. 가끔 있는 일이라 누구 할 것 없이 화투장을 주섬주섬 모아 자리를 정리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우리 모과약차나 한 잔씩 어떻노.”

따뜻한 모과차가 금세 돌려진다. 향기와 온기에 마음까지 사르르 풀어진다. 남자 회원들은 장기판에 선수 입장을 하고 느릿한 신경전을 벌인다.

“보소. 내가 한 수 위지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아니제.”

가만히 보니 대작하는 사람보다 훈수 두는 사람들 입심에 더 시끄러워지는 모양새다.

“형님, 오늘 아침 운동 갔다 왔능교.”

“그럼. 운동심으로 살아가는데 쉴 수 있나.”

소파에 편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잘한 일상의 걱정과 시름은 금세 잊혀진다. 혼자 나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니까. 비록 다리가 아프고 길 나서기 힘겨워도, 참꽃축제며 벚꽃축제도 서로 손잡고 함께 갈 수 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옷가게를 꾸려가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나이도 많고 힘에 부쳐서 가게를 접고 좀 쉴까 해.”

순간 친구를 통해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차례 통화 끝에 상당량의 옷가지를 무상으로 넘겨받았다. 옷 상자가 도착하자 경로당 한자리에 다양한 옷들을 펼쳐놓고 바자회를 열었다. 단지 내 입소문이 나서 외부 손님까지 찾아와 경로당이 복작거렸다. 옷을 팔면서도 손녀 줄 선물을 사며 즐거워했다. “젊은이도 귀찮은 일을 하다니, 나이 드신 분들이 대단해”라는 칭찬도 들었다. 그렇게 우리 손으로 번 돈을 ‘경로당 통장’에 입금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우리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평온한 삶이 반복되지만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일도 발생한다. 친구처럼, 형제자매처럼 지내던 회원들이 떠날 때마다 그 빈자리가 허전하고 쓸쓸하다. 이별하고 다시 만나는 인연의 굴레가 운명이라면, 이 또한 넘지 못하겠는가.

나이 들어가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유로움은 경로당이란 공간 안에서 서로 버팀목이 되고, 공동체라는 연결고리가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노인으로서 경로당에서 어울리며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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