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한국 최초의 동요가수 이정숙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한국 최초의 동요가수 이정숙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2.05.02 10:51
  • 호수 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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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우리나라 동요, 1920년대 첫 등장

이정숙‧서금영 등 뛰어난 가수

홍난파 지도 아래 동요 절창

올해 어린이날 맞이하며

동요가수들의 노력 기억했으면

동요(童謠)는 어린이의 생각과 표현을 담아서 만든 가사와 노래의 조화로운 혼합적 구조물이지요.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깨끗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이 그 속에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탈로 말미암은 시련과 고통에 허덕일 때에 당시 아동문학가들은 숱한 동요를 만들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줬습니다. 그 이름도 고결한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을 비롯해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윤복진, 박태준, 윤석중 등 당대 최고의 아동문학가 및 작곡가들이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보급과 확장에 노력했던 일들은 이제 아득한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봉건시대에는 어린이란 말조차 없었지요. 그저 개똥이, 돼지, 강아지 따위의 동물명으로 부르고 인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아동들에게 어린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그들의 존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선각자들의 거룩했던 꿈과 포부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동요는 192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취입동요 음반들을 가수별로 집계를 해보면 누가 가장 최고의 동요가수였었던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다 취입가수는 단연 50여곡 이상을 음반에 취입한 이정숙(李貞淑)입니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 2곡과 작사 1편까지 포함해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한국 근대 최고의 동요가수였습니다. 이정숙은 한국 근대동요사에서 동요음악을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한국 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금강키네마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유명영화감독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이었지요. 무성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를 김영환과 함께 제작했습니다. 이때 삽입곡 주제가(‘강남 달’)를 유경에게 부르도록 했는데 이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자 1929년 7월, 이미 동요가수로 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이정숙에게 이 노래를 정식으로 취입시키고 무대 위에서 직접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정숙은 유명작곡가 홍난파로부터 동요창법에 대한 개인 레슨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 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설정식과 윤석중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년 1월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년 6월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는 불과 23세였습니다.

홍난파는 서금영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31년 홍난파의 조카딸 홍옥임이 친구 김용주와 동성애에 빠져서 파트너와 함께 열차에 투신자살한 쇼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끼던 제자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절창 ‘봉선화’가 빚어졌다고 하는군요. 노래 속의 봉선화는 조카딸 홍옥임이기도 했고, 요절한 제자 서금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식민지 시대에서 동요음반은 이처럼 가슴속에 쌓인 상처와 울분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민족의 삶에 마치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은 부드럽고 아늑한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로 고단한 마음을 한결 안정시켜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올해의 어린이날을 맞이합니다. 아득히 흘러가 버린 세월 저쪽에서 이정숙과 서금영, 그리고 이름이 아주 묻혀버린 소녀 동요가수들의 애달픈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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