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전통色이야기 7] 모든 복색, 예법에 맞게 입도록 법으로 정해
[한국의전통色이야기 7] 모든 복색, 예법에 맞게 입도록 법으로 정해
  •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22.05.09 10:38
  • 호수 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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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색 (定服色)

복색(服色)의 복(服)은 머리끝(冠, 관)에서 발끝(신발)까지 입는 모든 것을 말하며, 색(色)이란 착용하는 모든 복(服)의 색을 가리킨다. 임금의 예복(禮服)에서 신하의 공복(公服)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색(服色)을 법으로 정(定)하는 것을 ‘정복색’(定服色)이라고 말한다.

『예기(禮記)』에 예(禮)는 옳고-그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명백히 하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분별하고, 이로써 백성이 난을 일으키려는 것을 막는다. 귀천과 상하의 등급이 있기 때문에 의복(衣服)에 신분의 차별이 있고, 조정에는 지위의 순서가 있으니 백성은 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복색은 엄격하게 예법에 맞게 입도록 법으로 정했다. 복색이란 단순한 옷의 형식이나 색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왕조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복색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관복(冠服/公服), 제복(祭服), 상복(喪服)이다. 복색의 문제는 조선시대 예송(禮訟)을 일으킬 정도로 당파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복색을 정하는 데에는 옷의 양식(스타일)보다 색이 더 중요했다.

자색, 비색 옷은 고위직만 입어

한국사에는 복(服)의 양식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색(色)은 복잡하고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직품(職品: 벼슬의 품계)의 서열도 복색으로 나타냈다. 

한국사에서 복색을 정한 최초의 기록은 백제 고이왕 27년(260)인데, 자(紫)색, 비(緋)색, 청(靑)색의 순서였고. 조선 영조 20년(1744)에는 2품 이상은 비(緋)색, 당상 3품은 홍(紅)색, 종3품 이하는 청(靑)색, 7품 이하는 녹(綠)색 도포(袍)를 입었다. 

이와 같이 복색은 왕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자(紫)색, 비(緋)색, 단(丹)색, 홍(紅)색이 상위 복색이고, 청(靑)색, 황(黃)색, 녹(綠)색, 심청(深靑), 천벽(天碧) 등은 하위 복색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 색은 우리들이 보통 알고 있는 그런 색이 아니고 매우 미묘한 뉘앙스의 색상(色相)으로서 이 또한 전통색 연구의 한 영역이다. 조선 태조 3년(1394) 정도전은 “제왕(帝王)이 천명을 받으면 반드시 복색(服色)을 변경하고(必變服色), 휘호를 고치는 것(易徽號)은 모든 사람들의 보고 듣는 일을 하나로 통일하여 폐단을 고쳐서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상소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색의 차이로 사람의 신분과 계급을 나타냈다. 서양에서도 프랑스 혁명(1789) 이전까지는 계급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었으며, 우리나라도 근대화 이전까지는 반상(班常)에 따라 복식(服飾)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백성이 꽃무늬 비단 입으면 처벌”

일반적으로 군왕과 귀족의 복색은 화려하며, 하층 서민의 옷은 장식과 색깔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채색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고려도경』(송나라 사신이 고려의 풍경을 기록한 책)에도 백성이 꽃무늬 비단을 입은 사람은 처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조시대의 복색은 권력을 나타내는 기호(記號)였을 뿐만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치국(治國)의 수단이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색 옷을 입지 못하게 한 기록이 많다. 

오늘날에는 경제적, 사회적 수준에 따라 다르게 입는 복색은 그 사람의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한국 사람이 백색 옷 입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백성의 정체성과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생겼던 의식(意識)이다. 

정시화 국민대 조형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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