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억세게 운 좋은 남자”
[백세시대 / 세상읽기] “억세게 운 좋은 남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5.09 10:42
  • 호수 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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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은 자를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능력과 스펙이 출중해도 천운을 타고난 자에겐 별 수 없다는 얘기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얼추 맞는 것도 같다.

기자는 1990년 무렵, 절대 권력자가 연루된 ‘정인숙 피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정종욱을 뒤쫓고 있었다. 그는 정인숙의 친오빠로 동생을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로 안양교도소에서 19년 넘게 수감 중 가석방된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정인숙은 ‘고급콜걸’로 고위층 인사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다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친부로 대통령, 국무총리 등이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70년 3월 17일, 서울 합정동 강변도로에서 정인숙이 차안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고 운전수 역할을 했던 정종욱이 범인으로 현장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정종욱이 진범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듣는 이는 없었다. 이 사건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삿감이었다. 많은 기자들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종욱이 수감된 교도소를 찾아가는 등 발품을 팔았으나 기자들을 일체 만나주지 않았다.  

기자는 그의 출소 소식을 접하고 바로 안양교도소를 찾아갔다. 교도소 관계자를 통해 그가 서울 응암동의 한 자동차안테나 부품회사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정종욱은 교도소에서 자동차안테나를 조립한 인연으로 밖에 나와서도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수차례 회사 관계자를 만나 설득한 끝에 정종욱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입에서 자신은 당연히 총을 쏘지 않았을 뿐더러  여동생 살해범은 청부업자이며, 아이 아버지가 국무총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꽃을 들고 여동생의 묘지를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진을 구해 잡지에 게재했다. 타 매체의 많은 기자들과 경쟁 속에서 그를 가장 먼저 만나 사건의 내막을 보도해 특종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를 접촉할 수 있었던 건 다분히 행운이었다. 많은 기자들이 안양교도소와 자동차안테나 조립회사를 찾아갔겠지만 ‘별’을 따는 찬스는 단 한사람에게 돌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운이 좋다. 우선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부터 천운이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시대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촛불시위를 등에 업고 좌파 운동권이 득세하면서 그들의 아이콘인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어부지리로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또, 레임덕을 모르고 퇴임하는 유일한 대통령이 됐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그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45%이다.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도 30%를 넘지 못했다. 부동산정책 실패 등으로 양극화와 국민 분열이 심화됐으나 ‘문빠’, ‘대깨문’ 같은 극성팬들 덕에 철통같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인’을 만난 자체가 문 대통령의 ‘복’이다. 2000년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밖에 얻지 못해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지위를 상실했다.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도 115석으로 한나라당(133석)에 크게 밀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회 주도권을 쥐기 위해 총선 전 깨졌던 DJP 공조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자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공조 복원의 조건으로 자민련을 국회교섭단체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새천년민주당은 자민련과 손잡고 그해 7월 국회 운영위에서 교섭단체 요건을 ‘20석 이상’에서 ‘10석 이상’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때 이만섭 국회의장이 DJ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개정안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바람에 JP의 욕심은 무산됐다. 나중에 국회의원 꿔주기 식으로 결국은 교섭단체 등록은 했지만 이만섭 의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은 의장으로 의정사에 남았다.

‘검수완박’ 법안이 국회에서 위장 탈당 등 편법으로 통과되는 과정에서 박병석 국회의장이 보여준 행동은 이만섭 국회의장과는 천지차이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돕는 ‘은인’을 만나 ‘문 정부 방탄법’을 완성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그보다 더 운 좋은 대통령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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