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취임사에서 빠진 말
[백세시대 / 세상읽기] 취임사에서 빠진 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5.16 10:51
  • 호수 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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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단체장을 대신해 취임사나 인사말, 축사 등을 여러 번 써본 경험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연설문을 직접 쓰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담은 확고한 경영 의지와 미래 비전을 보다 분명하게 잘 전달하고자 전문가의 손에 맡긴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설문 작성에 직접 손을 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6월 29일 정치 참여 선언을 할 때나 지난해 11월 5일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됐을 때 그리고 지난 3·9대선에서 당선수락연설을 할 때 실무자의 초안을 기본으로 상당 부분을 본인이 수정했다고 한다. 

지난 5월 1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윤 대통령이 17분여에 걸쳐 읽은 취임사도 마찬가지다. 이번 취임사는 무려 16명의 인원이 매달려 열흘에 걸쳐 쓴 것이다. 이각범 카이스트 명예교수와 이재호 전 한국출판문화진흥원장이 이끈 취임사준비위원회는 16명의 토론을 거쳐 취임사 초안을 만들어 지난 4월 25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윤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글을 다듬었고, 김종도 연설기록비서관이 보좌하며 취임 일주일 전 즈음 대략의 취임사는 사실상 새로 쓰이는 수준으로 재창조됐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반지성주의’를 언급한 부분이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민주당을 비롯 박범계·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등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한 피해자로서의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얘기인 듯하다. 

반지성주의는 1963년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란 책을 출판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반공의 광기로 몰아갔던 매카시즘에 주목한 책이다. 매카시즘은 동서 냉전이 한창일 때 미국에서 일어난 반공 사상으로 미 공화당 상원의원 J.R. 매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205명에 대해 추방을 요구하고,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한 데서 발단이 됐다.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이 초(超) 보수적인 정치적 흐름을 그의 이름을 따 ‘매카시 선풍(旋風)’이라 불렀다.

매카시즘처럼 집단의 정체성을 내세워 지성을 배제하고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는 것이 반지성주의이다. 역사적으로 반지성주의는 독재정치체제에서 이견을 압살하기 위해 동원됐다. 나치 독일이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나약한 엘리트로 규정해 정치적 탄압을 가한 게 대표적 사례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 역시 반지성주의의 소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대표적이다. 당시 MBC의 선동적인 보도 등 미국산 수입소고기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과장됐다고 주장했던 전문가들이 조리돌림의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닫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05년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 당시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은 황 박사 지지층으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아야 했다. 

개인적으로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말이 하나 있다. ‘용서’이다. 취임사에 ‘자유’란 말은 35번이나 쓰였지만 이 말은 보이지 않았다. 남북전쟁 막바지 재선에 성공한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이 나라의 상처를 싸매도록 온 힘을 다합시다. 전투에서 쓰러진 군인과 미망인, 고아들을 돌보도록 노력합시다”라고 말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후보들 간 치고받은 막말과 비방, 후보 부인들을 둘러싼 온갖 의혹과 구설로 인해 양극화와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 와중에 평범한 소시민들이 받았을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말이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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