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어린 순조에게 하명하길…‘할 말이 있으니 대신들 좀 모으라’”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어린 순조에게 하명하길…‘할 말이 있으니 대신들 좀 모으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5.30 10:55
  • 호수 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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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수렴청정. 정순왕후는 4년간 어린 왕 뒤에 앉아 통치 행위를 했다.
영화 속의 수렴청정. 정순왕후는 4년간 어린 왕 뒤에 앉아 통치 행위를 했다.

15세 때 66세 영조와 결혼…증손자(순조) 앞세워 천주교 탄압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대신들과 말다툼 한 편의 사극 보는 듯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신 나라 일을 보던 것을 말한다. 여성이 발을 치고 그 뒤에서 정치를 한다고 해서 발 ‘렴(염·簾)자가 들어갔다. 발을 내린 건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세상을 뜨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조의 조모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1745~1805년)가 대왕대비로 승격돼 4년간 증손자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의 결혼과 관련해 TV 드라마, 유튜브 등에 자주 등장하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15세 때 당시 66세의 영조(1694~1776년)와 결혼해 ‘조선 왕조에서 가장 나이 차가 많은 혼례’라는 기록을 남겼다. 평생 아이를 가진 적도 유산을 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처녀라는 기록도 없다. 

영조가 부인 정성왕후(貞聖王后·1692~1757년)를 먼저 떠나보내고 홀아비로 지내던 어느 날 주위에서 슬그머니 재혼 얘기가 나왔다. 재혼에 대해 처음엔 마뜩찮아 하던 영조는 신하가 재혼에 반대하자 그 신하를 파직시키고 경주 김씨 오흥부원군 김한구(1723~1769년)의 여식인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중 가장 대표적인 통치 행위가 천주교 탄압으로 이를 신해 신유박해라고 한다.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칭하며 1801년 2월 22일 천주교 엄금에 관해 이렇게 하교를 내렸다.   

“지금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금수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겉으로 말은 이러했지만 실은 정치적 반대파(남인과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숙청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은 유배됐고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 등 다수의 천주교인들이 처형 됐다. 

정순왕후는 그밖에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을 처형시켰다. 또 정조가 설치한 왕의 호위군대 장용영(壯勇營)을 폐지하고 규장각을 축소하고 정조가 내쳤던 사람들을 대거 중용해 측근에 앉혔다. 그러나 순조의 결혼만은 정조의 의지를 반영했다.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에 봉하고 관직을 주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끝내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6개월 만에 다시 수렴청정을 하려다 대신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이때 대신들과 나눈 대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적나라하게 실려 있는데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정순왕후는 “할 말이 있으니 대신들 좀 모으라”고 명을 내렸다. 대신들이 입궐하자 정작 그녀는 순조 뒤에 수렴을 치고 앉아 있었고, 순조가 “자전께서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신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소론인 좌의정 이시수(1745~1821년)가 갑자기 정순왕후의 지난 4년간의 업적을 칭송하더니 “그건 그렇고 지금 하는 일이(수렴 재개) 이치에 맞습니까? 할 말이 있으면 성상께서 하실 것이니 수렴하지 마시죠” 라고 대놓고 수렴을 거둘 것을 청했다. 

그러자 벽파의 수장인 우의정 김관주도 동의했다. 워낙 명분과 상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지라 정파가 다르고 아니고를 떠나 사실상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였다.

이에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중한 것은 다 알지, 근데 요즘 대사간 권유(벽파)를 탄핵하면서 나오는 말을 보니까 누군가가 김조순(시파)의 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 '누구'가 대체 누구냐? 대간의 상소가 명백하지 않으니 상황이 더 시끄러워지잖아. 그래서 대간에게 그 '누구'가 누군지를 분명히 하고 나온 김에 내 심중에 있는 말도 다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시수는 지지 않고 반박하길 “그렇다면 성상께 말씀드려 조용히 하면 되지 왜 수렴 치고 나와서 자전 마마의 공덕에 손상 끼치십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에 정순왕후가 슬슬 열 받아서 “사람들이 뭔 일만 있으면 다 내 탓이라고 수군대나 난 공덕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 참겠다. 나보고 오늘 스스로의 공덕을 해쳤다고? 분통한 일이 있는데 해명도 못 한단 말이냐?”라고 외쳤다. 이에 이시수가 대답하길 “그럼 성상께 말씀드려 처분하면 되지 왜 수렴을 치고 엄한 하교를 내리시나요?” 라고 했고, 이에 김관주가 “이시수의 말이 맞다”고 거들었다. 정순왕후는 “내가 수렴 거두면서 큰 형정에는 참여한댔지?”라고 과거의 일을 상기하자 이시수는 “물론이죠. 작은 일에도 얼마든지 참여하시지요. 그런데 수렴은 거두고 전하를 통해서 참여하세요. 그럼 자전 마마의 공덕이 빛날 것입니다” 라고 했고 정순왕후는 정말로 열 받아서 “내가 공덕이 어디 있소? 지금 공덕이란 거짓말로 날 속이는구나!” 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이시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요? 신하 된 몸으로 그런 죄를 짓다니 마땅히 죄값을 받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정순왕후는 “내가 무식해서 오늘 좀 추태를 부렸다. 그런데 나도 말 좀 하고 살자. 왜 그것도 못하게 만드냐?”라고 좀 누그러진 투로 말하자 이시수는 통곡하면서 “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신은 즉시 죽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했고, 김관주가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정순왕후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순왕후가 백기를 들고 “내가 견식이 없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죄 삼지는 말아 주시오. 앞으로 일이 있으면 언교를 내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수렴을 거두고 물러났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재 시도는 이처럼 대신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고 순조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자 정순왕후의 영향력도 약화됐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정치는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정순왕후는 1805년 2월 11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눈을 감았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에 영조와 함께 묻혔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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