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壽 & 白首 - 고추장 단지를 비우고 씻어서 엎어 두는 까닭은
白壽 & 白首 - 고추장 단지를 비우고 씻어서 엎어 두는 까닭은
  • 관리자
  • 승인 2006.08.2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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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는 삶을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를 사는 방식이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돼 있다. 육체적으로 힘든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도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정보들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알게 모르게 하루 종일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며 머리를 쓰고 공부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참선이나 명상에 현대인들의 관심이 높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나라에서 요가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지적인 활동을 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요가에 심취한다고 한다.

 

요가라 하면 몸을 비틀고 기괴한 동작을 하는 수련쯤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은 ‘비움’이다. 힌두교 교리를 집대성하고 요가법을 정리해 낸 인도의 파탄잘리는 ‘요가는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마음을 먼저 비워야 팔을 꼬거나 몸을 비트는 기상천외한 요가 동작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물론 무념무상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정도의 상태가 되어야 요가 동작이 가능하다는 철학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마음속의 번뇌, 즉 마음활동을 하고 난 뒤에 생기는 찌꺼기들을 배설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수련을 하고 공부를 한다.

 

‘비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오래된 고추장단지가 있다. 부지런한 주부들은 고추장을 다 먹은 뒤에 단지를 씻어서 장독대에 엎어 놓는다. 다음에 다시 쓰기 위해서다. 이런 집의 고추장은 항상 맛있다. 고추장단지 자체도 늘 새것 같이 오래 쓸 수 있다.

 

그런데 고추장 단지를 비워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그뿐인가. 더 있다. 여기서부터는 가히 ‘비움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백화점 농산물 코너의 데코레이션 부스에 놓거나 도심 퓨전레스토랑에 인테리어 장식품으로 빈 고추장단지를 놓는 경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본래 고추장단지였으나 비움으로 인해서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장식용으로서 가치가 있는 까닭은 지금 고추장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워졌기 때문에 예전 고추장단지였다는 사실이 의미 있고, 장식용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도 고추장단지와 마찬가지다. 비워짐으로 해서 건강할 수 있고,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있다. 잘 비우면 그 삶이 편하고 아름답다. 정신건강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마음을 비워’ 성공했다고 한다.

 

‘마음을 비웠더니 돈이 잘 벌리더라’ ‘맺혔던 일이 풀리더라’ 등의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다.

 

‘비움’이 오늘날에는 생활이나 산업적인 면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흔히 인테리어와 같은 디자인 분야에서 단순한 색상과 비움(혹은 여백)의 미학을 살린 젠(禪)스타일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역설한 노자에게서도 ‘비움’과 ‘없음’의 철학을 찾아볼 수 있다. 노자는 아무것도 없는 것, 혹은 비어 있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쓰임새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三十輻共一       ,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爽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거칠게 의역을 하자면, 수레바퀴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있는 것은 바퀴통이 원래 가운데가 뻥 뚫린 빈공간이기 때문이고, 옹기그릇이 그릇으로 쓰이는 것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고 집을 짓고 문을 만들지만 결국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그 안이 비어 있기 때문이며,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롭게 쓰인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무)이 있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없는 것이 있는 경우를 몇 가지 찾아보자. 우리 전통음악은 극단적으로 고조되면 일순 소리가 멎는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도 슬픔이나 고통이 극한상황에 처하면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양화의 여백이나, 눈(雪)도 같은 경우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텅 비워진 것 같지만 아니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꽉 채워져 있다.    

 

타성적으로 버리는 것을 꺼리고 비우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목표가 크고 욕심이 많다면 더 많이 효과적으로 비우거나 버려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것으로 더 많이 채울 수가 있다.

 

연로한 어르신들에게도 ‘비움’은 삶의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다. 잘 비워 둔 고추장단지처럼 그 자체로도 의미 있고, 전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기회를 맞기도 한다. 비우지 못하고 삶의 관성에 따라 욕심을 내고 화를 내며 살아가면 당신만 쓸쓸하고 건강에도 해롭다.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몸을 정히 하고 마음의 찌꺼기를 배설하는 행사를 가져보는 것도 정신적 스트레스 많은 시대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요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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