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7] 삼복더위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 “그 뒤주는 누구의 발상인가”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7] 삼복더위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 “그 뒤주는 누구의 발상인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6.13 13:30
  • 호수 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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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에 나오는 뒤주.
영화 ‘사도’에 나오는 뒤주.

영조 “어영청에 그게 있었는지 내 어찌 알았겠느냐”

장인 “차라리 제가 홀로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조선의 21대 왕 영조(재위 1724∼ 1776년)는 아들 사도세자(1735~1762년)를 쌀 뒤주에 가둬 죽게 했다. 영조가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르게 된 원인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질환이 바로 아버지 영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사도세자가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로서 15세에 대리청정을 수행할 정도로 머리가 똑똑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세자를 들볶지 말고 가만히 놔뒀으면 아버지 이상으로 국가를 잘 다스릴 왕이 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시선도 있다. 

결국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으로 인한 구박과 핍박에 의해 아들이 공포와 불안 속에 지내다 끝내는 정신질환을 얻어 비참한 종말을 맞았을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도세자의 잔학성과 포악함이 연산군 뺨칠 정도라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등을 보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촉발시킨 건 어머니의 고발이다. 사도세자가 “아무렇게나 하고 싶다”며 한밤중에 칼을 들고 수구(水口)를 통해 경희궁에 거하고 있는 영조 가까이 갔다 되돌아온 직후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근래에 세자가 그릇된 일을 꾸미는 것이 심해져서 그동안 한 번 아뢰고자 했으나 모자간의 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세자가 근래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분(영조)을 묻고자 하였으며 시중드는 이에게 머리를 풀어헤치게 하고 곁에 날카로운 칼을 두고서 헤아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려고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저 역시 죽을 뻔 했는데 겨우 모면했습니다. 제 한 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전하의 옥체가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옥체의 위급함이 한숨 사이에 닥쳤습니다.”

영빈 이씨는 이어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명에 달하고 그들을 불로 저지르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행했습니다.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져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옥체를 보존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사오니 부디 대처분을 하십시오”라면서도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자의 정이 있고 병환으로 그리 된 것이니 병을 어찌 꾸짖겠습니까. 처분은 하시나 은혜를 베풀어 세손 모자를 평안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영조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영조는 1762년 윤 5월 3일, 창경궁 문정전에서 아들을 꿇어앉힌 뒤 “내가 죽으면 300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종사를 오히려 보전할 수 있으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며 칼을 던져주고 “자결하라”고 명했다.

사도세자가 자기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칼로 스스로 찌르려고 하자 현장에 있던 신하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이를 본 영조가 “뒤주를 가져오라”고 하명했고, 사도세자는 7월의 삼복더위에 뒤주 안에 갇혀 숨막혀하다 8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살인도구는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뒤주를 제일 먼저 입 밖에 꺼낸 이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 즉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라고 한다. ‘정조실록’ 정의한의 상소문에 “뒤주는 역사책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인데 그 당시 홍봉한이 창졸간에 멋대로 바쳤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대왕(영조)께서 그 뒤주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이것은 충신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이를 갈게 되는 일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영조도 후에 손주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그 일을 있게 한 자는 바로 홍봉한이다. 내가 어떻게 어영청에 뒤주가 있다는 걸 알았겠느냐, 내가 그 위에 풀을 덮을 생각을 어찌했겠는가. 너는 그를 외조부라 여기지 말고 원수로 대해야할 것이다(박종경의 ‘현고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봉한은 이와 관련, 한 지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합니다. 차라리 제가 홀로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박종경의 ‘현고기’)”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고 한다.

영조는 나중에라도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을까. ‘정조실록’에는 영조가 “우리 아들은 현명했는데 신하들이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장차 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끝으로 ‘사도세자’의 시호(諡號)인 ‘사도’(思悼)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시호란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사도’는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은 뒤 내린 시호이다. 시호는 아무렇게나 짓지 않고 ‘시법’(이선의 ‘사법총기’)의 정해진 규칙에 따라 글자를 정한다. 시법에서의 ‘사’(思)자는 ‘생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했다’는 의미로 쓴다. 영조가 ‘사’자를 내려준 건 사도세자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고 봤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해석이다.  

‘도’(悼)자 역시 시법에선 ▷고인이 수명 전에 일찍 죽거나 ▷어려운 시기에 처했거나 두려움에 떨었을 때 ▷고인이 방자하게 행동하고 귀신 제사에 힘썼을 때 이 자를 쓰게 했다. 즉 ‘슬퍼하다’는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역사학자들은 영조가 아들이 요절을 했기 때문에 이 자를 내린 것으로 추측한다. 

일반인들은 ‘사도’를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과 비극적 운명을 슬퍼하는 의미에서 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원래의 뜻은 그게 아니다. 놀라운 사실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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