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어느 노소녀(老少女)의 편지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어느 노소녀(老少女)의 편지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2.06.27 10:40
  • 호수 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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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1987년 ‘백석시선집’ 출간 계기로

백석 연인 자야 여사와 만나게 돼

백석을 향한 자야의 마음 담은

절절한 편지는 또 한 권의 책으로

원고 정리하던 그때 기억 새로워

1987년 늦가을, 내가 여러 해 동안 준비해온 ‘백석시전집’(창비)이 발간됐다. 백석(白石, 1912~1996)이란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매몰시인이었다. 분단이라는 태풍과 격랑 속에서 자신의 고향인 평북 정주에 눌러 살았으므로 한국에서는 월북시인의 분류에 휘말려 들어가 금지된 시인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분단이란 현상은 태풍 끝의 산사태와도 같은 매몰을 불러와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붕괴돼 원래의 형체가 소멸되고 말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분단시대의 매몰문학인이나 예술가들에 대한 그동안의 금지해제 조치가 하나둘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류에 용기를 얻어서 나는 진작 백석 시인의 풋풋한 문학성과 그 놀라움이 사무친 가운데 가랑잎처럼 흩어진 백석의 시작품을 한 편 두 편씩 수집 정리하여 기어이 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된 직후 ‘백석시전집’을 보고 감격해서 나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온 분이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1930년대 후반,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 20대 젊은 시절 함흥과 서울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어떤 곡절로 말미암아 작별을 하고 말았던 기생 신분의 자야(子夜) 여사였다. 

그렇게 연결된 인연으로 이후 나는 십여 년 가량 자야 여사와 서로 왕래하는 정분이 생겼다. 그녀는 나를 만나서 마치 예전의 애인 백석 시인을 대하듯 밥숟가락 위에 반찬도 올려주고, 내 이부자리가 깔린 방바닥이 차지는 않은지 불쑥 요 밑에 손을 넣어 쓸어보기도 했다. 백석 시인에게 다하지 못한 정성을 나에게라도 쏟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빌라맨션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아 자야 여사는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백석 시인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며 지내던 함흥시절, 혹은 서울 청진동 시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그냥 한 번 듣고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깝고 소중하고 살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자야 여사에게 깊은 밤, 생각과 번민으로 잠 이루지 못할 때 백석 시인에게 드리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서 나에게 보내달라고 제의를 했었다. 그게 발단이 되어 자야 여사는 백석 시인에게 드리는 투정과 하소연, 그간 하고 싶었던 가슴 속에 쌓인 말을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지에 길게 강물처럼 쏟아서 보내왔다. 

일제 말 백석 시인이 만주를 함께 가자며 줄곧 따라다니며 보채듯 채근할 때 그게 싫어서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어 다니다가 자꾸만 숨은 곳을 찾아내는 게 또 싫어서 마침내 중국 상하이로 도피성 외유를 떠나버렸다. 그런 미안하고 가슴 아픈 추억담이 만지장서(滿紙長書)로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이었다. 

편지를 직접 대해서 보게 되면 자야 여사의 글씨는 전형적 1930년대 문체를 그대로 지녔고 오로지 세로쓰기로 한글부호도 없고 띄어쓰기나 문장의 매듭도 주지 않고 요즘 스타일의 정서법 규칙도 전혀 없는 문체였다. 그렇기에 자야 여사의 편지글 문체를 쉽게 확인해서 읽어 내려가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어떤 부분은 거의 판독(判讀) 수준이었고, 그래도 잘 모르는 부분은 따로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서울 가서 자야 여사 본인에게 한꺼번에 묻고 확인하는 그런 과정을 별도로 거쳤던 것이다. 

백석 시인과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김자야 에세이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은 바로 이런 과정과 곡절을 거쳐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자야 여사의 글씨를 두고 세상에 하나뿐인 ‘자야체(子夜體)’라 놀렸다.

그 자야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대 청춘기 백석 시인과의 지고지순했던 사랑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여인. 기생 자야의 회고록을 정리하던 시절이 새롭다. 자야 여사는 편지 말미에서 자신을 일컬어 꼭 ‘노소녀(老少女)’라고 즐겨 썼다. 

내 호칭을 ‘인출’이라고 쓴 것은 나의 아명이 ‘인출(寅出)’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경인년이었고, 바로 그 해 유월에 내가 태어났으므로 아버지께서는 꼭 그렇게 부르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야 여사가 나를 인출로 불러주어서 나는 이따금 자야 여사를 첫돌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여길 때도 있었다. 다음은 자야 여사의 편지글이다.

<출아 출아, 인출(寅出) 선생!

어찌타 글은 쓰라고 하시어서 없는 박식 쥐어짜느라 비지자루만 터져버리고 고갈된 창고에 그나마 중언부언 잠꼬대 같이 써놓고 보니 내가 살아온 고난의 생애에 외로웠던 여로 중 돌이킬 수 없는 가장 값진 아름다웠던 청춘을 영상으로 비치어보는 생생한 환상. 뜨거운 정열의 불꽃 튀는 두 청춘. 한데 묶어 뒹굴어보는 이 추억. 늦게 얻은 큰 보물입니다. 소중합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청춘이 그리워 사랑이 그리워 가슴이 터지도록 흐느낄 때 구천에 계신 백석 선생도 뜨거운 눈물을 지었고 지상에서는 인출 선생만이 처절한 두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 가슴 아파 하시었지요. 그런대로 솜씨 내시어서 잘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래가 가정교사를 믿고 쓰는 글이 아닙니까? 노고를 빌면서

노소녀(老少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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