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윤보선 前대통령 ①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윤보선 前대통령 ①
  • 관리자
  • 승인 2006.08.2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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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건강·절제·종교생활·덕담이 ‘장수비결’

명문가 자제로 법도와 안정적인 정서생활
“90세 돌아가시면 수(壽) 다했다”할 만큼 장수집안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두번째로 윤보선 전대통령 편을 2회 연속 게재합니다.

 

1960년 4·19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뒤 들어선 제2공화국은 아주 짧게 지나갔다. 헌법을 독재정치 위험성이 많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정한 뒤 민의원과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을 선출한 8월 12일로부터 이듬해 5·16이 일어난 때까지 불과 9개월여 기간 동안 존속됐다.

 

의원내각제에서의 대통령은 의례적(儀禮的)인 국가원수여서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은 역대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존재감과 지명도, 그리고 치적 면에서 불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재임 기간이 9개월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윤보선 대통령의 이름은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다. 불의의 5·16 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30년을 더 살았으니 전직대통령 직함으로 장수했다고 말하기 십상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전직대통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두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제1야당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정계원로로서 역할을 하며 30년을 보냈다.

 

정치 여건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현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제2공화국에서 해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을까  4·19 당시 권력 주도세력인 민주당 구파와 신파간의 권력 분담의 결과이겠으나 1945년 해방 전후와 1950년대 우리 정치사에 등장하는 숱한 이름들에 비해 이때 등장하는 대통령 윤보선은 어딘지 생소하다.

 

하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외에도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이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서울시장에 오르고, 연이어 상공부장관, 두 번의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해방전후의 시기는 물론이고 6·25 이후의 이승만 정권 시기에 이미 입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평윤씨 장문의 장남으로 건강하게 성장

 

해평윤씨 홈페이지(www.yunposun .com)에 올려진 가계도를 보면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 윤치소공을 비롯하여 삼촌인 윤치영, 애국가를 작사하고 월남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한국 YMCA를 만들었다고 하는 윤치호 등 현대사를 수놓은 굵직굵직한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윤치호 선생은 윤보선 대통령의 5촌 당숙(부친 치소공의 사촌 형)으로 1945년 타계할 때까지 우리나라 기독교와 교육계 등 여러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일제시대 우국지사들과 8·15 해방 이후 나라를 세우고 국정을 이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교육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윤보선 대통령의 안국동 집은 1910년대 무렵부터 해평윤씨 장문(長門)으로서는 물론이고 윤치호 선생의 사촌동생 집으로써 초기 기독교인들과 우국지사들의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했다.

 

윤보선 대통령의 조카인 소설가 윤남경씨는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할아버지의 사촌인 윤치호 선생이 “틈만 나면 우리 집에 오셨다”고 적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 부친의 사촌형이려니와 안국동 고택이 일제시대 기독교계 우국지사들이 수시로 모여드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해평윤씨 홈페이지에 따르면 윤치소공은 뜻이 있는 우국 민족재력가였다. 집 앞의 안동교회 장로로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고, 상해임시정부와 미국의 이승만 대통령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또 경성방직의 전신인 ‘경성직뉴’를  민족자본의 육성이라는 대의에 따라 인촌 김성수에게 거의 헐값으로 양도하기도 했다. 젊은 윤보선은 이런 부친과 집에 드나드는 민족의 선각자들의 영향과 가풍에 따라 건강하게 성장을 했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지도자 33인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다. 그리고 이들 기독교인들은 남감리교회 1호 신도이며 우리나라에 남감리교회를 도입한 윤치호와도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를 통해 서구문물에 대해 일찍 눈을 떴던 만큼 윤보선 대통령 집안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유학을 다녀오게 되는데, 윤보선 청년은 유학에 앞서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최연소 의정원의원이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있다가 연금을 당하던 중에 해방을 맞게 된다. 윤보선 대통령은 해방 직후 ‘민중일보’ 사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나라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으로 발탁되고 오래지 않아 상공부 장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불화를 겪으며 야당 국회의원으로서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1960년 4·19 후에 등장한 윤보선 대통령, 생소하지 않은 이름

 

그러니 4·19로 들어서게 된 제2공화국에서 윤보선 대통령의 이름은 생소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구파에서의 윤 대통령의 정치력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정치분석가들에 따르면 바로 그 점이 5·16을 야기한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의례적인 국가수반으로서의 윤 대통령의 리더십과 장면 총리의 국정지도력의 불협화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결국 두 지도자의 불화로 인한 정계의 혼탁과 학생들의 급진적인 시위가 빌미가 되어 제2공화국은 단명하고 말았다.

 

1961년, 불의의 5·16 군사 정변에 의해 물러나게 된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로 기록됐다. 그리고 1990년 94세로 서거할 때까지 야당 대통령 후보, 야당총재 등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전직대통령 직함으로 생존한 인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그런데 5·16 이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윤보선 대통령이 어떻게 30년 넘게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며 장수했을까  여러 가지 비결이 있으나 윤보선 대통령 집안사람들은 타고난 건강과 절제, 종교생활, 그리고 덕담을 꼽는다. 직계가족만이 아니라 윤씨 댁으로 들어간 며느리와 사위들까지 장수하는 이유로 어떤 이들은 ‘끔찍한’ 효도 때문일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해평윤씨 홈페이지 가계 연보를 보면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던 시기에도 윤보선 대통령 집안 사람들이 대개 장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가 85세, 부친이 70세, 삼촌 윤치영이 100세를 넘겼을 정도다.

 

윤보선 대통령의 조카 윤남경씨는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집안 내력이 “70대에 돌아가시면 요절했다 하고, 80대에 돌아가시면 빨리 돌아가셨다고 하고, 90세에 돌아가시면 수를 다하셨다고 했을 만큼 장수 집안이다”고 했다.

 

그리고 안국동 8번지, 지금의 윤보선 대통령 고택에서 살았던 어릴 적(일제시대 때)에도 장수비결을 묻는 편지가 왔던 기억이 있다고도 했다. 할아버지가 “윤씨 댁이 장수 집안으로 소문이 파다한데 필경 무슨 묘약이 있을 것인즉, 당신들끼리만 몰래 먹지 말고 공덕을 쌓는 셈치고 자기네들한테도 가르쳐 달라는 거야”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윤남경씨는 또 자신이 안국동에 살던 소녀시절에 친구들이 안국동 집에 놀러왔다 가면서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껄껄,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고 명랑한 양로원에 온 것 같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윤보선 대통령과 그 집안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명문가 사람으로서의 전통을 이어받아 안정적인 정서생활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계속>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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