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8] 왕세자 입학례 “정조는 10세에 치러… 모시·단술·말린 포 수업료로 내”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8] 왕세자 입학례 “정조는 10세에 치러… 모시·단술·말린 포 수업료로 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7.04 13:18
  • 호수 8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17년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의 한 장면(경남대학교박물관 소장).
1817년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의 한 장면(경남대학교박물관 소장).

공자 신위 모신 성균관서 의식 거행…유학이 통치의 근간이란 의미 

스승에 3번 수업 요청…책상 없이 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경전 읽어

왕세자가 유학도 된 것을 신하들이 축하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 마쳐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조선의 왕세자 입학례는 나라 대사 중 하나였다. 의식의 규모와 절차가 성대하고 엄중했다. ‘왕세자입학도첩’에 왕세자는 8명이 받드는 가마에 앉았고, 앞뒤로 100여명의 신하와 군졸들이 따랐다. 이 의식은 서울 명륜동에 위치한 성균관에서 치렀다. 왕이 될 세자가 이곳에서 입학식을 갖는 건 앞으로 유학의 사상과 이념을 근간 삼아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 양성을 위해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이자 공자 등의 신위를 모신 제향 공간이기도 했다. 관리후보생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므로 입학해 유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대체로 양반사대부 자제들에게 국한됐다.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년)의 입학례는 국조보감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정조는 10세 되던 해인 1761년 3월 10일 입학례를 했다. 성균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공자의 신위를 모신 대성전으로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했다. 

유생복으로 갈아입은 정조는 관세위의 대야에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공자의 신위 앞에 나아가 향을 세 번 피우고 술잔을 올리고 절을 네 번 한다. 이어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사상에게도 똑같이 예를 올린다. 

작헌례를 마치면 명륜당으로 이동한다. 지금의 강의실이다. 바로 명륜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동편에서 대기한다. 명륜당 안 동편 계단 앞에 스승인 박사 김양택(1712~1777년)이 홍포를 입고 기다리고 있다. 스승이 수업을 허해야 들어갈 수 있다. 이 절차를 ‘왕복’(往復)이라고 한다. 김양택은 노론의 핵심 거두로 영의정을 지냈다.

정조가 “세손 산은 수업 받기를 원합니다”고 말한다. 그러면 김양택이 “신은 덕이 없으니 청컨대 왕세자는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거절한다. 이 과정을 세 번 되풀이 한다. 스승이 스스로를 낮추고 예를 갖춘다는 뜻에서다. 장명(將命)유생이 양쪽의 말을 전하느라 두 사람 사이를 분주히 오간 끝에 결국엔 김양택이 “신이 사양을 하여도 허락을 얻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승낙한다.

실제로 왕세자는 여느 유생들처럼 성균관에서 숙식하며 공부하지 않는다. 입학례 당일에만 잠시 공부하는 시늉을 하고 실제로는 궁에서 혼자 과외수업을 받는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또 하나의 의례가 기다린다. 바로 스승에게 수업료를 바치는 수폐(受幣)이다. 정조는 준비해간 모시 세필, 단술 두말, 말린 포 등을 비단광주리에 담아 올린 뒤 절을 두 번 한다. 

스승은 흑단령으로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고 정조는 책상도 없이 바닥에 책을 펴놓고 마주 앉는다. 학교에선 스승이 위인지라 비록 왕세자라 할지라도 마주보고 책상을 놓지 않았다. 

조선 17대 왕 효종(1619~1659년)은 이와 관련해 “일반 백성도 책상을 쓰는 판에 세자가 몸을 구부린 채 어떻게 글을 읽는가”라며 대신들에게 책상을 내 놓게 하라고 했지만 대신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된 정조가 심오한 질문을 던져 스승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정조는 ‘소학’의 내용 중에서 “명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이 혁연(赫然)하도록 하자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정조는 ‘소학’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다.  

“궁리(窮理)와 수신(修身)은 학문의 큰 것이다. 명명이 혁연하여 내외(內外)가 있지 않으니 덕이 높고 업이 넓어야 이에 그 성(性)의 처음을 회복한다.” 

재밌는 점은 정조의 이 질문에 김양택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점이다. 왕세자 입학례를 기록한 ‘국조보감’에는 ‘박사 불능대’(博士 不能對)라고 쓰여 있다. 이 광경을 보던 유생들이 “성인이 나셨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입학례는 신하들의 축하를 받는 수하례(受賀禮)로 모두 끝난다. 명실공히 성균관에 와서 유학도가 된 왕세자를 신하들이 축복하는 것이다. 

이날 수하례에 참석한 영조(조선 21대 왕·1694 ~1776년)는 “우리 세손은 인후하고 온량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 틀림없이 학업이 날로 발전할 것이다. 앞서 경전에 대해 어려운 부분을 질문했는데 뜰에 가득한 선비들을 북돋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왕세자 입학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수업료로 예물을 바치는 것과 수업을 청하는 번거로운 과정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인 듯하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