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①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①
  • 관리자
  • 승인 2009.04.24 14:10
  • 호수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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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창립 40주년] 노인단체 태동기에 관여했던 주역들

대한노인회가 4월 15일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69년 4월 15일 사단법인체로 발족, 현재에 이르고 있는 대한노인회는 ‘노인의 권익신장과 노인복지증진에 기여하며 회원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설립목적에 따라 지난 40년 동안 대한민국 대표 노인단체로 굵은 획을 그어왔다. 백세시대은 4월 15일 대한노인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박재간(86)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대한노인회 고문)의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를 연재, 대한노인회의 발자취와 역사를 정리한다.

필자가 공산권문제연구소의 이사장 겸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67년 가을 어느 날, 박관수 前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으로부터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한번 만나자”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그가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직을 사임한 후 몇 개월간 피차 만날 일이 별반 없었던 터였다. 명륜동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요사이 어떤 노인들이 찾아와서 새로 조직되는 노인단체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고 하는데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 좀 알아봐 달라”면서 그 사람들의 명함 몇 장을 내놓았다. 당시 박관수 옹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은사라는 점 때문에 권력과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부탁을 하러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며칠 후 그 명함의 주인공인 박근양 사직경로당회장, 구본석 성북경로당회장, 황한연 우국노인회장, 김제운 정능노인친목회장, 김익전 길음경로회장 등 5명을 내 사무실로 오시도록 했다. 박근양 회장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선비였고, 김익전 회장은 성북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분으로 언어와 행동 모두 단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한연 회장은 과거 일본에서 정규대학을 나왔고, 한때 한국통운의 사장직을 지낸 분이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사회의 웃어른에 해당하는 노인들이 앞장서서 도덕재건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노인단체를 조직하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운동을 전개해 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 그들은 이미 서울시내의 각 경로당 회장 등 2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전국노인단체연합회창립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내걸고, 전국 각지의 경로당 회장들로 하여금 노인단체결성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지방의 주요도시에는 대표를 파견해 이 단체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조직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 중에는 운영비 조달이 어렵다는 점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중앙회 대표의 이름 석자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야 하는데, 그러한 면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런 중에 박관수 어르신이 동경제국대학 출신이고,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현직 대통령의 은사이기도 하니 이 단체의 총재직을 맡아 준다면 단체가 급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돼 부탁을 드리는 중이라고 했다.

당시 박관수 옹은 한국반공연맹에서는 손을 뗐지만 단군숭모회와 전국박씨종친회격인 신라오능보존회의 회장직을 맡아보고 있던 처지라 노인회를 조직하는 일까지 맡아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도덕과 윤리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자는 그들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찬동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단체운영에는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전제로 이 단체의 명예총재직을 수락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필자는 박관수 옹과는 한국반공연맹 창설 당시부터 인연이 있었다. 또 당시 필자가 운영하던 공산권문제연구소에 그를 명예이사장으로 모시고 있던 터라 신라오능보존회와 단군숭모회 사람들은 필자를 회장보좌역으로 불렀다. 박관수 옹을 총재로 추대했기에 노인단체의 회원들은 나를 총재보좌역으로 불렀으며, 나 역시 그러한 호칭에 대해서 별반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당시 이 노인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단체운영에 열성이었던 분들 중에는 앞서 거명한 인사들 이외에도 영등포의 구본서, 노량진의 이명환, 상도동의 안백기, 종로의 김양근, 동대문의 김흥만, 용산의 연길복 그리고 성북의 박순락·김영재, 마포의 윤주옥 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들은 박관수 옹에게 계속 회장직에 취임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회장직을 승낙하지 않음에 따라 1968년까지는 황한연과 김익전이 번갈아 대표직을 맡아보기는 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눈에 띠지 않았다.

그들은 때때로 윤리도덕과 관련 있는 국민계몽용 전단 원고를 갖고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것을 인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단체가 공식적인 모임을 마련한 때에 한해 박관수 옹은 필자를 대동하고 그 모임에 참석했을 뿐 단체 운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별반 아는 바가 없었다. 한동안은 무언가 활발히 움직이는 듯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재정난, 그리고 지도력 부족 등으로 침체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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