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어르신’, ‘아버님’ 호칭 유감 / 신은경
[백세시대 금요칼럼] ‘어르신’, ‘아버님’ 호칭 유감 / 신은경
  •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 승인 2022.07.18 12:01
  • 호수 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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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신은경 전 KBS 아나운서

예순 갓 넘은 사람에 ‘어르신’

언제 보았다고 ‘아버님’ ‘어머님’

당사자는 당황스럽고 때로 불쾌

하지만 환대, 존경의 의미도 있어

너그럽게 이해해주면 어떨까

남편이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자, 계산대 젊은 직원이 물었다. “어르신, 에스프레소는 맛이 아주 쓰고요. 양이 아주 쪼금 나오는 진한 커피예요. 괜찮으시겠어요?” 무지렁이 노인네 취급을 받은 것 같은 순간, 남편은 당황해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 함께 서 계시던 전직 교수님이 대신 답변을 했다. “이 분 누구신지 모르지요? 예전에 파리 특파원….” 그러나 그 말은 카페의 소음에 묻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로 휘발해 버렸고, 직원의 질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동문서답이 되고 말았다. 

그제서야 남편은 “네. 알고 있어요. 에스프레소 주세요”하며 돌아섰다. 아마도 이전에 에스프레소를 시키고는 왜 이리 조금 주느냐, 왜 이리 쓰냐고 불평하는 어른들이 간혹 있었던 모양이어서 직원은 확인차 친절함을 발휘한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우스꽝스런 그 상황은 그렇다 치고, 그 ‘어르신’이란 단어를 들으니 최근 TV를 보다가 언짢았던 일이 생각났다. 코로나 4차 백신을 맞으라고 권유하는 뉴스 보도에서 ‘60세 이상 어르신’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60세 넘으면 어르신이야? 물론 질병관리청에서 내려온 공문에 따라서 하는 표현이겠지만, 그리고 리포트하는 30대 기자의 입장에선 부모님 같은 분들을 생각해 존경의 마음을 담아 별 생각없이 그렇게 한 것이리라. 그러나 당사자인 ‘60세 이상 어르신’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신 맞으러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집으로 와버리고 싶었다.

‘어르신’처럼 당황스러운 호칭은 ‘아버님, 어머님’이다. 얼마 전 비슷한 나이의 선배 몇 명과 어울려 이야기하던 중, 난데없는 ‘어머니, 아버지’ 호칭에 놀랐다고 입을 모았다. 또래 중에서도 아직 사회활동도 하고 있고, 외모가 그리 늙지 않은 축에 낀다고 생각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는 얘기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어떻게 우리가 ‘어머니’인 걸 알았을까? 아무리 아닌 척해도 우리의 생김새가, 즉 체형이 말해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체력관리에 신경을 써도 엉덩이가 펑퍼짐해지고, 예쁘지 않게 살이 빠지는 게 그 증거라고 말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근데 우리가 왜 그들의 어머니야? 

함께 웃었으나 내게는 찔리는 일이 있다. 남편이 정치를 하던 시절, 배우자로 그 지역 경로당을 수없이 많이 다녀야 했던 나는 ‘어머님, 아버님’ 호칭의 주범이었다. 해당 지역에는 경로당이 40개가 넘었다. 경로잔치가 있을 때마다, 밥을 해서 나눠 먹는 월례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고 발 마사지, 침·뜸 봉사활동이 있을 때마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내 딴에는 가장 다정하고 친근한 호칭이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분들은 우리 친정어머니와 같은 나이셨고, 내 엄마보다도 더 자주 그분들과 만나고 지냈으니, 가깝기로 하면 ‘어머니’라 부른들 잘못될 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 호칭이 불편하셨던 어른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정겹게 맞아주셨던 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예순을 갓 넘은 사람에게 ‘어머니’라니!

소설가 김훈도 그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에 실린 단편 ‘저녁 내기 장기’에서 ‘아버님’이란 표현은 ‘아무런 경로심을 포함하지 않는, 무인칭의 늙은이를 부르는 호칭’이라고 말했다. ‘식당이나 동사무소에서 젊은 직원들에게 ‘아버님’이라 난데없이 불리는 것을 당황스럽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진보적 노인’을 쓴 58년 개띠 저널리스트 이필재 작가도 이런 호칭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과유불급, 과공의 풍조로 느껴진다며 대안으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제안했다. 나 또한 그 말에 공감하며 ‘선생님’이라 불렸을 때 그럭저럭 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인칭, 무성별, 나이와 상관없는 호칭 아닌가.

그런데 한국음성학회 회장을 지냈던 김상준 전 KBS 아나운서는 이 호칭에 대해 무척 너그러운 해석을 내린다.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은 누구누구의 아버님, 아무개의 어머님 같은 표현에 앞부분이 생략된 일종의 ‘자녀 중심 언어표현’이 아니겠는가라고 풀어줬다. 언중의 언어표현이 그렇게 대세로 오래 진행된다면 일단 얼마 동안은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다. 

이제 70대 후반인 김상준 선배는 한의원에 가서 그런 호칭으로 안내를 받으면 오히려 다정하고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순을 갓 넘은 후배의 경우엔 좀 당황스러웠겠다’고 내게 위로의 말씀도 곁들여 주셨다.

진심 어린 존경이란 찾아볼 수 없는 ‘어르신’, 혹은 뜬금없는 ‘아버님, 어머님’ 같은 호칭이 아직 내게는 탐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 더 관대하게 이해하고, 푸근하게 마음을 넓혀 환대와 존경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 나쁠 일도 없을 것 같다. 이상은 이제 막 ‘어르신’ 대열에 들어 예민해진 까칠한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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