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9] 정약용의 신통방통 의술 “왕의 중병 치료에 불려갈 만큼 잘 고쳤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9] 정약용의 신통방통 의술 “왕의 중병 치료에 불려갈 만큼 잘 고쳤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7.18 14:12
  • 호수 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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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11명 중 7명 병사, 유배지서 살아남으려 의학에 매진

홍역 치료법, 종두법 소개한 ‘마과회통’ 등 다수 의학책 저술

‘노인 되니 유쾌한 일 여섯 가지 된다’며 ‘노인일쾌사’ 짓기도

정약용 초상화. 오른쪽 눈썹이 천연두를 앓아 셋으로 나뉘어졌다.
정약용 초상화. 오른쪽 눈썹이 천연두를 앓아 셋으로 나뉘어졌다.

[백세시대=오현주기자]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왕의 병환 치료로 궁에 불려갈 정도로 의술에 능했다. 그는 69세 때 세자의 중병 치료에 동참했다. 당시 내의원의 추천 이유는 ‘방외에서 의술에 정통한 사람을 진료에 활용한 이전의 전통’에 따라 평소 의학 이치에 익숙한 전 승지 정약용과 전 감찰 강이문을 들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73세 때 또 한 차례 순조의 중병 진료에 참여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렇지만 순조가 갑자기 숨을 거둬 정작 치료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정약용은 가족과 친지로부터 질병 상담과 치료 의뢰를 빈번히 받았다. 74세 때 집안 형의 풍비(風痹)에 대해 정약용은 약치와 침구를 처방으로 내놓았다. 

“풍비로 마비가 오는 증세는 침 맞고 뜸을 뜨는 것만 한 게 없습니다. 풍을 다스리는 것은 칠현에 뜸을 뜨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약치와 식치는 인삼과 녹용을 넣은 대보탕과 소고기와 낙지가 들어간 음식만 한 게 없습니다.”

정약용은 의원 노릇을 하면서 실제 경험하거나 의학책들을 참고한 것 가운데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들을 추려 ‘의령’이라는 책을 썼다. 백성은 정약용의 책에서 밝힌 처방에 크게 의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옻오른 증상 즉, 칠창(漆瘡)에 대해서는 자신이 목격한 방법, 청소유(들기름) 한 작을 술에 섞어 복용하는 것을 권했다. 몸 붓는 병에 청소유를 쓰고 목구멍이 부어 아프고 막혔을 때는 박꽃 위를 나는 나방 분말을 약으로 만들어 쓰고, 물사마귀에는 화살대를 태워 얻은 찌끼를 응축하여 연고로 만들어 바르고, 수두에는 달걀 흰자위를 채운 밀가루 떡을 환부에 붙이라고 한다. 인후 통증에는 백합, 폐의 가래에는 귤껍질 조각 씹기, 치통에는 황련을 씹어 머금기가 최상의 방법이라고 한다. 요통에는 두충이란 약재로 만든 술을 건조시킨 후 찧은 가루를 쓰라고 한다. 

정약용은 수많은 약재가 들어간 약을 쓰는 것에 대해선 반대했다. 30여 가지 약재를 합쳐 하나의 환으로 만들어진 청심환은 단지 몸의 열을 서늘하게 식히는 데서 효과를 내는 약일 뿐 소문처럼 죽은 사람도 살리는 약으로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약용은 약 복용 시 주의할 점도 언급했다. 그는 “약이 되는 까닭은 오직 약의 성질과 맛이 있기 때문인데 만일 약을 달여 김으로 누설된다면 약효가 떨어지거나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약의 용량을 많이 쓸 때 인삼 한두 돈을 넣어봤자 인삼 즙은 모두 다 약재에 스며들거나 약을 짜는 베에 묻게 돼 비싼 인삼의 낭비가 있으므로 약과 인삼을 따로 달인 후에 섞어서 복용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천연두를 앓았던 병력, 자식들을 일찍 병으로 잃은 일, 유배 생활에서의 생존 목적 등이 이유다. 정약용은 2세 때 ‘백세창’이라 불렸던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져 호를 ‘삼미자’(三眉子)로 붙이기도 했다.

그는 14세 때 홍진으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홍진을 마진, 홍역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조선에 홍진이 대유행이었다. 정약용은 명의 이헌길 덕택에 살아났음을 밝히면서 은혜에 보답한다는 취지로 1797년 이헌길의 ‘마진기방’ 등 63종의 의서를 고증해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찬했다. 마과회통은 마과 즉, 홍역 계통 병과 그 치료법을 모아 잘 통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다. 

이 책은 중국, 일본의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마진 중심의 발열성 발진 질환 총정리 작업이었다. 책의 별책에선 제너의 종두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자식이 11명이었는데 이 중 7명이 세 살 이전에 병사했다. 정약용은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780년 미상. 태어나지 못하고 태아 상태에서 사망. 1781년 장녀 8개월 만에 출산돼 나흘 만에 사망. 1791년 3남 만 2살이 지나 두옹(천연두로 생긴 부스럼)으로 사망. 1794년 2남 태어난 지 22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 1798년 4남 태어난 지 22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 1798년 5남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미처 이름도 짓기 전에 천연두로 사망. 1802년 6남 세 살 때 두진으로 사망.

정약용은 산 애보다 죽은 애가 곱절이나 되는 것에 관해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라며 통곡했다. 

정약용의 의약생활과 건강관리는 1801년 유배 이후의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유배를 간 곳은 경상도 장기와 전남 강진이다. 서울에 비해 좋은 의원도 없고 약재도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벽지였다. 그곳에서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고립감,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다는 데서 오는 분노, 외딴 객지 생활에서의 가난, 바닷가의 이질적인 풍토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심신이 피폐했다.

정약용은 50세 때 중풍을 앓은 뒤로 평생을 고생했다. 형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입가에는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마비 증세를 느끼고 혀가 굳어져 말이 어긋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57세 때 ‘목민심서’를 썼고, 그해 8월에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를 마치고 한양의 본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에 ‘흠흠신서’를 완성했다. 그가 평생 쓴 책이 무려 500권에 달한다.

정약용은 해배 이후 관직을 다시 맡기를 기다렸으나 조정에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세자 중병의 진료에 참여할 당시 부호군(副扶軍) 직에 임명됐다. 부호군은 종4품 무관직이나 조선 후기 특별한 직위가 없는 이를 궁중에 들이기 위한 관직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것도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끝으로 정약용이 71세(1832년)에 ‘노인이라 유쾌한 일이 여섯 가지나 된다’는 것을 자랑삼아 노래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를 옮긴다.

▷민둥머리라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어져 유쾌하다.

▷치아가 없어 치통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유쾌하다.

▷눈이 어두워 주역 괘사 연구할 것도 없어 유쾌하다

▷귀가 어두워 온갖 시비 다툼 듣지 않아 좋으니 유쾌하다

나머지 둘은 붓 가는 대로 글을 마음대로 쓰는 것과 하수만을 골라 심심풀이 바둑을 즐기는 것이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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