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경찰의 추억”
[백세시대 / 세상읽기] “경찰의 추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8.01 11:26
  • 호수 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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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경찰에 대한 기억은 별로 살갑지 않다.” 

국민 대부분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기자는 중학교 때 덕수궁 돌담길로 학교를 오갔다. 어느 날 오후 책가방을 들고 늘 다니던 길을 가는데 갑자기 성인남자 4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중 한 명이 “차고 있는 시계를 풀어서 달라”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 길은 늘 한산했다. 한 남자가 “호주머니에 칼이 있다”며 손을 주머니에 넣고 들썩거렸다. 순순히 시계를 풀어주자 그들은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시 망설였다가 인근의 파출소를 찾아갔다. 한 경찰관이 몇 가지를 물으며 기록하더니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이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물론 경찰서를 찾아갔을 때부터 시계를 찾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경찰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후로 경찰이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고 소중한 재산을 지켜준다는 말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청년이 돼서도 경찰에 대한 기억은 썩 좋지가 않았다. 군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국민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1970년대는 장발단속과 통행금지가 엄했다. 뒷머리가 셔츠 칼라를 덮으면 바로 경찰서로 데리고 가 ‘바리깡’으로 밀어버렸다. 밤 12시 이후에 집밖으로 나오면 즉시 연행됐다. 경찰의 이미지가 공포에 가까운 순간도 있었다.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에서 벌어진 우 순경 난동사건. 의령군 경찰서 우범곤 순경이 동거인과 말다툼 끝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들고 나와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려 주민 62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사태였다. 그 사건으로 경찰의 허리에 찬 권총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경찰에 대한 악몽은 전두환 정권에서 절정에 달했다. 대학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전기·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시치미를 뗐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사건 조작과 거짓말을 국민이 눈으로 확인하는 첫 사례였다.

경찰의 성고문 전력도 이때 생겨났다. 이른바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다. 여대생 권인숙(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위장취업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부천경찰서의 문귀동 경장은 수배자의 소재지를 대라며 밤샘 고문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적나라한 성적 폭행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경찰이 정권의 충실한 심복이란 사실은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에서 확연히 증명됐다.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30년 절친인 송철호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울산시장 김기현 후보(현 국민의힘 의원)의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하명수사를 벌였다. 황 청장은 이때의 눈부신 활약에 대한 보답으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요즘 경찰은 과거와 달리 정권의 순한 양만은 아닌 듯하다. 최근 경찰국 신설과 관련돼 집단 반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발의 이유가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통제를 받으면 중립과 자주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경찰은 청와대 정무수석이나 민정수석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었다. 그러면서 권력이 시키는 대로 경찰력을 행사했다. 이때는 그 누구도 경찰의 중립과 자주성이 훼손됐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선거공약대로 민정수석실을 없애면서 경찰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해 경찰국을 만든다고 하자 갑자기 경찰의 중립과 자주성이 훼손된다고 아우성이다. 통제 기구가 청와대에서 행정안전부로 바뀌었을 뿐인데 말이다.  

국민은 ‘민중의 지팡이’란 수식어가 거론될 때마다 남사스럽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나마 경찰의 미덕 중 하나는 “정권에 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중대 국가기강 문란”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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