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0] 조선 ‘명재상’ 황희의 눈물겨운 은퇴기 “천둥·번개 잦은 건 제 탓…저를 파직해주소서”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0] 조선 ‘명재상’ 황희의 눈물겨운 은퇴기 “천둥·번개 잦은 건 제 탓…저를 파직해주소서”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8.01 14:27
  • 호수 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5세에 처음 은퇴 의사 밝힌 이후 매년 파직 상소문 올려 

세종 “한 달 두 번만 조회에 나오라”며 재택근무 명하기도  

세종이 세상 뜨기 4개월 전…87세에 비로소 자리서 물러나

황희의 초상화
황희의 초상화

[백세시대=오현주기자] 황희(1363~1452년)는 가장 오래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고려 말 우·창·공양왕을 비롯해 조선의 태조·정종·태종·세종을 모시며 56년의 관직생활 중 우의·좌의·영의정과 6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그 중 영의정만 18년을 지내기도 했다.

황희의 은퇴 당시 나이는 87세였다. 그 나이에도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던 건 순전한 타의에 의해서였다. 황희는 65세에 은퇴하고 싶었지만 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대궐을 나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밀당(?)이 이어졌다. 황희의 은퇴 간청은 눈물겨울 정도였지만 세종은 ‘재택근무’라는 편법까지 동원하며 황희를 옆에 두려고 했다. 

황희는 65세에 첫 사직서를 올렸다. 당시 심각한 가뭄이 들자 황희는 “가뭄이 든 것은 영의정인 자신 탓”이라며 “파면시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은 “신하들이 누가 자기 직분을 다 하겠느냐”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70세가 되던 해 “신이 노병이 잦아 귀와 눈이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신의 직무를 파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사직을 청했다. 세종은 이에 대해 “죽을 만큼 쇠약하지 않고 병도 깊지 않다. 오히려 기력도 좋아 얼마든지 국정수행이 가능하다. 만약 깊은 병에 걸리면 치료하면 되지”라며 거절했다. 

황희는 해마다 사직상소문을 쓰기 시작했다. 74세엔 “노병이 자주 찾아오고 종기에서 피가 멈추지 않으며 현기증이 더하여 생각이 흐리멍덩하니… 바라옵건대 신의 직을 파하여 주옵소서”라고 쓰기도 했다.   

한번은 기회가 온 것 같기도 했다. 사헌부로부터 “황희는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권신이다”라며 탄핵 요청의 상소문이 올라왔다. 황희는 이에 대해 “내가 생각해도 사헌부의 주장이 맞다”며 자신의 목을 치라고 했으나 세종은 일언반구 대꾸도 없었다. 

‘하늘의 뜻’이라는 핑계까지 댔다. 황희는 “천둥과 번개가 자주 치는 건 저 때문”이라며 “파직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은 빙긋이 웃으며 “날씨가 이런 건 내 탓”이라며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 

세종은 황희의 거듭된 은퇴 요구에 재택근무를 명하기도 했다. 세종은 “모든 업무를 집에서 보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면서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를 불러냈다.  

황희는 실제로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그는 76세에 “노쇠와 질병이 더욱 깊어져 갑니다. 몸은 노둔하고 건망증이 심하여 금방 듣고 말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귀가 어둡고 잘 들리지 않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며 결코 허식이 아닙니다. 노둔한 말이 피곤에 지친 정황을 불쌍히 보시고 여기서 더 달리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사직서를 디밀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상불윤’(上不允)이라고 기록돼 있다. 

황희는 81세에 “신이 윤허를 받지 못하여 억지로 종사하고 있는데 걷는 것조차 어렵고 구차하게 녹만 먹고 있으니 참으로 황공합니다. 신을 해면해주옵소서”라고 올렸다. 그러자 세종은 “힘들면 누워서 일하고 아랫사람을 시켜라”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드디어 황희 나이 87세에 이르렀다. 황희는 “신의 나이가 90이 가까운데 공은 없고 녹만 먹고 있으니 청하건대 신의 직책을 파해주옵소서”라고 했다.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449년 10월 황희는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바로 세종이 세상을 뜨기 4개월 전이다.

황희는 어떤 인물이기에 세종이 이다지도 아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중책을 맡겼을까.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한 황희는 고려 우왕 때 과거에 합격했다.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다가 조선으로 넘어가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요청에 성균관학관에 제수됐고 이어 왕명 작성 및 역사 편찬 등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사헌감찰 등을 지냈다.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했지만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져 파직되기도 했다. 양녕대군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 교하(현재 파주)로 유배되기도 했다. 후에 태종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권고로 황희를 높은 자리에 기용했다. 예조판서에 이어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했다. 이듬해에 대사헌을 겸대하고 1426년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됐고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됐다. 

황희는 평소에 담소하는 일이 적었고, 희노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은 성격이었다. 일을 처리할 때는 큰 원칙을 중요시했고 자질구레한 것은 묻지 않아 대범하고 정확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이 많지만 정작 쓸려고 하면 마땅한 인물이 없다. 어디에도 황희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구나”라고 했다.

세종으로서도 아버지의 신하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많은 학자와 관리들이 자신들이 몸담았던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해 관리로 나서지 않아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황희가 세종의 신임을 받게 된 사건이 있었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세종은 관찰사로 황희를 파견했고 이를 해결하면서 세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세종은 항상 황희가 식견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의 녹봉이 일 년에 쌀 100가마쯤이고, 10만 평이 넘는 땅과 100명이 넘는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황희는 청빈한 재상으로 소문이 났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황희 정승이 무려 10여 차례나 노비를 뇌물로 받아 문제를 일으켰고 그 일로 세종이 여러 번 그를 혼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황희를 끝까지 옆에 두려고 했던 건 그의 풍부한 공직 경험과 연륜, 모나지 않은 성격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50대에 명퇴 당하는 요즘 세태에 87세까지 공직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봐 황희는 타고난 관운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