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 회장
[인물포커스] 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 회장
  • 함문식 기자
  • 승인 2009.05.06 15:26
  • 호수 1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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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사막에 생명심고 좌절의 마음에 희망심다

▲ 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 명예회장.

사우디 불모의 사막에 연면적 250만평에 이르는 농장을 개간하고 배추와 무를 심어 중동의 건설 노동자에게 김치를 제공하겠다는 발상을 한 사람. 어린 시절 쫒겨나듯 등진 고향 땅에 70만평의 농지를 매입해 1만2000석의 소출을 내는 만석지기로 돌아와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전액의 장학금을 지원해 준 사람.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77) 명예회장이다. 최근 은퇴한 그는 일생을 통해 ‘흙농사’를 지었고, 그 땅의 소출로 장학회를 만들어 ‘사람농사’를 지었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사회에 봉사하며 ‘사랑농사’를 짓겠다고 한다.

특유의 의지와 뚝심으로 일군 농장은 이제 아들에게 물려 전문화된 과학영농을 꿈꾸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문화된 영농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영동농장은 이제 창업주 김용복 명예회장을 넘어 새로운 ‘생명과학영농 전문기업’으로 변모 중이다.

전 생애를 드라마틱하게 살아온 것처럼 온몸으로 에너지를 내뿜는 김 명예회장의 당당한 뒷모습에서 힘없는 노년의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를 만나 농사꾼으로서 살아온 그의 ‘농사꾼 철학’과 ‘제3기’를 시작하는 그의 인생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영동농장을 창업하게 된 계기는?
나는 어려서부터 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젖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부족한 가족의 사랑에 늘 목말랐으며,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채우지 못한 서러움. 어찌보면 나는 늘 부족한 것을 채우려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배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얻기 위한 예비된 시련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려운 상황은 의지의 초석이 됩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극복해 가면서 좀 더 단단한 의지를 가질 수 있었고, 겸손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조그만 땅에 소작을 부치느라 늘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땅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나이에 고향을 떠나며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땅을 많이 가질 것이고, 잘 살게 되면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숱한 인생의 부침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봤지만, 나에게 정직하게 보상을 해 준 것은 역시 땅이었습니다.

하던 사업이 망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미국계 회사의 행정 기능공으로 사우디로 나갔던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회사원 생활로도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나는 뜨뜻미지근하게 사는 것은 싫었습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막. 그곳에 작물을 재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노다지나 마찬가지란 생각을 했습니다. 1년에 4모작까지도 가능한 기후가 있었고, 늘 부족한 신선한 야채는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파견된 수많은 건설 노동자들은 느끼한 서양식단에 신물이 나 있어 한 조각 김치가 절실한 상황이었지요.

‘불가능’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미리 예단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영위하며 사는 모든 것은 과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우디보다도 못한 기후 조건에서도 농장을 경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로 농장일에 착수했습니다. 한국에서 영농기술자 8명을 데려와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작물을 재배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사막의 모래폭풍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지친 근로자들은 포기를 거듭해 희망은 보이지 않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입니다. 3개월간의 악전고투 끝에 1979년 4월 20일 우리는 기어코 배추를 생산해 냈고, 사막의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영동농장의 신화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한국인 근로자에게 김치는 말 그대로 ‘금치’였습니다. 이후 사우디 정부의 요청을 받아 밀농사도 시작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키워낸 배추, 무, 고추 등으로 재배한 김치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나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돼 사우디 왕궁까지도 출입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농사꾼도 ‘벤츠’를 타고, ‘왕궁’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 ‘인생 3기’로써 세 번째 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후, 내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농장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사우디의 농장을 모두 정리하고 귀국해 고향 강진의 간척지 땅 70만평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 농사의 품목은 ‘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농사’였습니다.

1982년 처음 시작한 ‘용복 장학회’는 현재 10억원 규모의 자산으로 17기, 104명의 장학생을 배출했고, 장학생들은 모두 사회의 동량이 되어 훌륭히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영동농장은 서울대 농대에서 수학한 아들에게, 용복장학회는 1기 장학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류재우 박사에게 넘겼습니다. 장학회는 내가 시작했지만, 이제는 장학회 출신의 모든 이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흙농사, 사람농사에 이어 마지막으로 ‘사랑농사’를 지을까 합니다. 내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황폐해진 농촌문화를 되살려 ‘사람 사는 냄새’ 나는 사회를 만들어보고자는 것입니다. 현재 100억원 규모의 출연금으로 (재)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 2006년부터 혁신적인 영농후계자들에게 시상하고 있습니다. 이도 현재는 강정일 농경제학 박사에게 넘겨 사실상 나는 일선에서는 모두 은퇴한 셈입니다.

전남 강진의 농장에서 매년 1만2000석의 쌀이 나옵니다. 내가 아무리 양이 크다 해도 그 쌀을 다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렇듯 넘치게 농사를 지었으니, 이제는 그 넘치는 쌀을 어떻게 잘 나눠먹어야 할까를 고민해야 될 때이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지을 농사는 다름아닌 ‘사랑농사’인 것입니다.

▲ 김용복 회장이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영동농장을 세울 당시의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 위기를 맞고 있는 농업의 올바른 방향은?
생산량이 폭증하면서 농업은 산업사회에서 천대받는 위치로 전락했지만, 어떤 사람도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전세계적인 인구폭발과 고령화 사회로의 이행은 전 인류에게 심각한 식량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농업은 단지 ‘산업’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젖줄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쌀이 남아 돈다고 마음 놓고 있을 단계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나라 농업은 대부분 60~80대 고령층에게 맡겨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촌에 가보면 이미 50대도 씨가 말라 60대가 젊은이 취급을 받을만큼 고령화 된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농업에서 은퇴하고 나면 우리 농사는 누가 짓겠습니까?

농업은 오랜 경험과 경륜에 의해 지어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농업인을 양성한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은 인원으로도 쌀농사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강진의 70만평 논은 그 시범 사업입니다.

나는 그 논을 이미 내 아들의 사업으로 인계했습니다. 물론 모든 창업주들이 그렇듯 미덥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족이든 기업이든 나라든 독불장군식으로 한사람이 모든 것을 처리하면 결코 우물 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와 방식이 좀 맞지 않아도, 답답해도, 나처럼 의지가 굳지 못해 보여도 묵묵히 뒤를 봐주며 창의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새시대의 패러다임에 맞는 기업발전을 일굴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아무리 국력이 강했던 나라도 폐쇄적인 나라는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개방화된 포용력이 기업의 생명력을 길게 한다고 봅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했습니다만, 저는 아들이 영동농장을 이끌어 가는 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새로 대표가 된 아들 김태정(39) 이사는 서울대 생명기술과학과를 졸업하고 (주)J&K미생물연구소를 설립해 토양미생물을 이용한 유기농법, 비료 개발 등을 통해 선진화된 농법으로 영동농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건강해야 사람이 건강한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김 이사는 음악요법, 미생물요법, 유기농법 등 건강한 농산물을 만들고, 새 시대의 조류에 맞는 농작물을 개발해 우리나라 농업혁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영동농장은 이제 나의 손을 떠나 김 이사에게 전해져 화려한 꽃을 피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영농을 통해 배울 점은.
씨앗과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공업, IT, 금융산업 등 수많은 산업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 왔지만 어떤 발전을 이룩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이 땅 위에서, 이 땅이 키워낸 작물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땅은 우리에게 놀라운 보상을 해 줍니다. 한 겨울, 추위를 견딘 밀알 하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온 들판을 다 채우는 밀알이 됩니다. 최초의 그 밀알은 땅에 묻혀 없어진 것 같지만 실은 수많은 밀알 속에 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영동농장을 통해 생산된 농작물과, 용복 장학회를 통해 배출된 많은 동량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나눌 나눔의 삶이 모두 최초의 밀알에 들어있는 가치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밀알 하나는 나 자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준 소중한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영농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좀 더 평온하게 내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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