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3] 말년을 행복하게 살다간 홍범도 장군 “고려극장 수위로 있으며 배우들과 어울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3] 말년을 행복하게 살다간 홍범도 장군 “고려극장 수위로 있으며 배우들과 어울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9.02 15:34
  • 호수 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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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금강산 사찰서 만난 비구니 출신과 결혼, 두 아들 둬

1920년 일본군 상대로 봉호동·청산리전투에서 대승

독립 운동가들 불행한 최후와 달리 넉넉한 노후 보내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일제에 항거한 독립의용군 홍범도(1868~1943년) 장군은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물론 대한민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날을 보지 못해 아쉬운 점은 있지만 여느 독립군의 말로에 비춰 볼 때 경제·심리적으로 넉넉한 노년을 살다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나중에는 망명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홍범도 장군은 그와 달리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른 채 안정된 직업을 갖고 천수를 누렸다.

홍 장군은 1868년 평양의 양반집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대 중반에 머슴살이를 끝내고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각오로 평양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우연찮은 사고로 상관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탈영해 금강산 신계사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승려가 돼 글을 배우고 한국사를 공부했다. 이때 비구니였던 아내 이옥구 여사를 만났다.

이 여사의 임신으로 두 사람은 절을 나와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홍 장군은 제재소에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여기서도 고용주와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강원도 산악지대로 도주해 산짐승을 사냥하는 산포수로 변신했다. 

1895년 을미의병이 발생하자 김수협 등 산포수 14명과 의병을 일으켰다. 배경은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단속법 발령 때문이다. 홍 장군은 당시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홍 장군은 사격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출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어 ‘포계’라는 포수 권익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홍 장군은 을미의병이 한창일 때 일본군과 3차례 접전을 통해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했다. 을미의병의 기세가 위축되자 의병을 해체하고 다시 포수 생활로 돌아갔다. 1907년 일제가 조선군대를 해산하고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다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을 내렸다. 홍 장군은 최대 600~700명으로 추산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37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아내가 일본군에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한 달 후 장남도 함경도 장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싸우다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홍 장군의 아들에게 2021년 3·1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차남은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주해 의병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했다.

홍 장군은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사령부장으로 뽑혀 봉오동전투에 참가했다. 같은 해 6월에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했다. 당시 홍 장군의 활약에 대해 일본인이 서술한 기록이 있다. 

제3순사대 와타나베 마사카쓰는 보고서에 “이도구, 어랑촌,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군대에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며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은 아닌 듯 하고 배하에 있는 조선인들로부터는 신과 같은 숭배를 받고 있다”고 적었다.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1921년 독립군은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후퇴했고 홍 장군은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에 올랐다. 이듬해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뤄지고 나서 결국 홍 장군도 무장해제가 됐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갔지만 홍 장군은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이때 두 번째 부인과 재혼했다.

홍 장군은 그간의 무훈 덕으로 연해주 남부의 한인 콜호즈 지역사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로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으로 옮겼다.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 남부 도시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다. 취업명령서에는 “1939년 3월 25일부터 월 100루블의 봉급을 받고 고려드라마극장의 임시사찰(수직원)로 근무한다”고 돼 있다. 그는 여기에 월 80루블의 연금을 더해 넉넉한 삶을 살았다. 당시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200루블이었다. 

태장춘의 아내는 홍 장군의 구술을 통해 ‘홍범도 일지’를 만들었다. 이 일지를 토대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연됐는데 이를 본 홍 장군은 “너무 추켜세워 부끄럽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홍 장군은 고려극장 맨 뒤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며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1942년 고려극장이 카자흐 동부 우슈토베로 옮겨간 이후로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여느 독립운동가와 달리 천수를 누린 홍 장군은 늘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홍 장군의 묘지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있다가 2021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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