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4] 조선 왕의 하루 “보고 받고, 상소 검토하고, 공부하고…쉴 틈 없어”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4] 조선 왕의 하루 “보고 받고, 상소 검토하고, 공부하고…쉴 틈 없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09.19 13:46
  • 호수 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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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1726년 3월 26일 영조의 하루를 되짚어보니 

창경궁서 오전 5시 기상, 내의원 문안 받으며 일과 시작 

오후 늦게까지 맹자의 ‘등문공’ 놓고 신하들과 열띤 토론 

[백세시대=오현주기자] 조선 왕은 하루가 어땠을까. 왕이랍시고 극상의 게으름을 피우며 여색만 탐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 실상은 정 반대이다. 왕은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승정원일기’ 1726년 음력 3월 26일자 내용에 있는 조선 21대 왕 영조(1694 ~1776년)의 하루를 톺아보자.

창경궁에 기거하는 영조는 보통 아침 5시에 눈을 뜨면 내의원에서 올리는 문안을 받았다. 내의원 도제조 민진원, 제조 조도빈, 부제조 정형익이 영조와 대왕대비전의 기후(氣候)를 물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왕대비전을 진찰한 어의가 “청울이진탕이 적합하다”는 진단을 내림에 따라 “약 5첩을 지어 내일부터 드실 수 있도록 하겠다”는 보고를 받고 윤허했다. 

영조는 아침 식사를 하고 공식적인 집무를 보기 위해 편전으로 나갔다. 이날은 약식 조회 성격의 ‘상참’은 생략하고 낮 시간에 임금과 신료들이 만나 공부하는 ‘주강’만 하기로 했다. 

이어 관상감에서 올린 천문 현상을 승정원 승지가 보고했다. 관상감은 매일 천체를 관측하고 햇무리나 달무리, 객성(客星·일시적인 별), 혜성 등의 천문 현상이 발생하면 기후를 관측한 단자를 작성해 왕에게 보고한다. 이날 올린 보고는 “묘시(오전 5~7시)와 진시(오전 7~9시)에 햇무리가 졌다. 오경(오전 3~5시)에 유성이 남두성 위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주먹 모양처럼 생겼고 꼬리의 길이는 3~4자 정도이며, 붉은 색이었다’는 내용이다.

새로 제수된 수령들이 궐내로 들어와 하직 인사를 준비했다. 이틀 전에 새로 임명된 여러 도의 수령들 가운데 아직 하직인사를 하지 않은 관원을 조사하라는 영조의 전교에 따른 것이다. 영조는 황주 목사 원명귀, 영동 현감 신사열, 정읍 현감 이산로, 신방구비 만호 민진정이 올리는 하직 인사를 받았다. 민진정에게는 활과 화살을 주어 보내라는 전교를 내렸다.

우승지 박성로가 내일 상참과 경연을 어떻게 할지 묻자 영조는 정지하라고 전교했다. 도승지 정형익은 다른 곳으로 옮겼던 종묘의 신주를 다시 제자리로 모시는 의식에 참석할 승지의 인원을 갖춰야 하니 비어 있는 승지의 후임을 차출하고 패초(牌招)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할 것을 청했다. ‘패초’란 승지가 왕명을 받아 신하를 불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어 각 관서에서 올린 계사(啓事)들을 보고했다. 종묘개수도감에서는 공사가 끝났으니 역군과 공장(工匠)을 모두 내보내겠다는 보고를 했다. 의금부에선 죄인 김세정이 부친상을 당했으니 돌아가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금위영에서는 군향(軍餉·군대의 양식)이 부족하니 금위영의 군보미를 속히 상납하도록 처리해 줄 것과 무예시험 전 과목에서 우등 합격한 한량 고만세를 별단에 써서 들인다는 내용 등을 보고했다. 이외에도 도총부, 총융청, 승문원 등의 관서에서 현안을 보고했다.

인사위원회를 열고자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동반 인사위원회인 이비에서 판서 이병상과 참판 조관빈이 사정이 있어 참석할 수 없다고 해 참의 홍현보 혼자서 긴요한 직임만을 뽑도록 했다. 유척기를 승지로, 홍봉보를 지평으로, 한계진을 정언으로 삼는 인사 발령이 있었다. 

이날 보고된 상소는 모두 세 건이다. 한 건은 병세와 개인 사정을 이유로 삭직해 주기를 청하는 장령 이제항의 상소였다.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는 속히 직임을 살피라”라고 비답을 내렸다. 비답은 상소(上疏)에 대해 임금이 내리는 답을 말한다.

다른 한 건은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체차(遞差·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해줄 것을 청하는 응교 이현록의 상소였는데 왕의 허락을 받기 전에 미리 궐문을 나가버려 추고해 경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머지 한 건의 상소는 경상도 유학 권태두 등을 위시해 610여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로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자 영조는 주강을 행하러 창경궁 시민당으로 나갔다. 이 자리에 지경연사 김홍경, 특진관 김취로, 참찬관 김고, 시독관 윤심형, 검토관 김상석, 가주서 안상휘, 기사관 이규휘, 기주관 유겸명, 종신 남원군 이설이 참석했다.

오늘 진강할 부분은 맹자 등문공(滕文公)의 ‘후직교민가색’에서 ‘오능치국가’까지다. 묻고 답하면서 열띤 토론이 오갔다. 주강 자리가 마무리될 즈음 시독관이 영남지방의 진휼(흉년에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 문제 등에 보고했고 영조는 진휼청에서 헤아려 보고하도록 했다.

영조는 주강에서 나눈 이야기에 미진하다고 느꼈는지 논의가 끝나갈 무렵 예정에 없던 석강을 하겠다고 했다. 

신시(오후 3~5시)에 시민당에서 석강이 열렸다. 이 자리에 김홍경 등 8명의 강관(경연청의 정4품 벼슬)이 참석했다. 토론의 대상은 맹자 등문공 ‘묵자이지’에서 ‘무연위간왈 명지의’까지였다. 영조가 한 번 읽었다. 시독관 등이 차례로 뜻을 아뢰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뒤 석강이 끝났다. 강관들이 물러나자 영조는 승지 이성룡을 불러 의금부 당상과의 일 때문에 나오지 않고 있는 이조 판서를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고 했다. 

이 날은 야대(夜對·왕이 학문 수양을 위해 밤중에 명망 있는 신하를 불러 강론을 펼치게 하는 일)가 없어 그나마 하루 일과가 일찍 정리된 편이다. 하지만 영조는 미처 검토하지 못한 사안들을 처리하느라 밤늦도록 불을 밝혔을 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고전번역원의 ‘후설’을 참고한 것임)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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