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어느 소년병의 6·25 참전일기”
[백세시대 / 세상읽기] “어느 소년병의 6·25 참전일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0.11 10:58
  • 호수 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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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기자는 개천절 연휴 때 흥미로운 책을 접했다. ‘어느 소년병의 6·25 참전일기’(이범경·글마당)란 제목의 이 책은 한 고등학생의 생생한 전쟁 체험을 통해 6·25에 대한 불가역적인 진상을 밝히고 있다. 

1933년 경기도 김포 출생인 이범경씨의 사회활동은 단순하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굴지의 섬유회사(동일방직) 공채로 들어가 동일레나운 대표이사가 되기까지 40여년을 수출 역군으로서 경제부흥에 매진한 것이 전부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이씨는 배재 고교생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피난을 갔지만 그는 입대를 위해 혼자 서울에 남았다. 같은 해 12월 제2국민병으로 징집돼 훈련소에 입소했고 그로부터 42개월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의 삶을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이유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의 역동기와 그의 생애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후진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과정에 그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씨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험하고 힘든 행군 과정을 일기를 바탕으로 상세히 기술했다. 12월 18일, 서울지역의 1700여명 징집자들은 집합장소인 창경원을 출발해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다는 인솔자의 말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양평역까지 갔지만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이탈자를 우려해 인솔자가 애초에 없던 기차를 꾸며낸 것이다. 

하루 평균 30km를 걷는 행군 끝에 4일째 되던 날 장호원에 도착했다. 영하 10도에 여주 남한강을 건너야 했다. 나루터의 자그마한 거룻배 한 척으로 많은 인원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짐과 옷을 배에 싣고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어깨까지 올라오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차가웠다. 

강을 건너 물 밖으로 나오자 피부에 살얼음이 붙는 것 같았다. 누군가 “바로 옷을 입으면 감기 걸리니 벗은 채로 한참 걸어가 몸이 풀리면 입으라”고 주의를 준다. 정말 그 말이 맞았다. 약 500m를 걸으니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고 몸이 풀리더니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

일행은 충주-수안보-문경-상주-군위-하양-경산을 거쳐 12월 30일 대구에 도착했다. 전국적으로 50만명을 도보로 이동시킨 민족의 대행군이었다. 잠사공장으로 쓰던 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이씨는 능력 있는 훈련 동기생 덕분에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사단 사령부 고급부관에 배속됐다. 그가 하는 일은 1만3000명에 달하는 3개 연대와 16개 직할부대의 인원을 매일 파악해 24시까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에 보고하고, 영문으로 된 보고서를 작성해 사단 사령부에 주재하는 미 군사고문단에 통보하는 것이었다. 이후 상관의 배려로 육군본부 사단 고급부관실 병력계서 근무하게 됐다. 

이씨는 사단장으로부터 그간의 병력파악 업무에 노고가 많았다는 치하와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참을 군에 머물다 1954년 6월 1일 의가사제대를 했다. 이씨는 6·25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6·25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소련의 음모를 이용한 김일성 개인의 정치적인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남한의 인명 피해는 안중에도 없이 한반도 무력적화라는 방법으로 일으킨, 불법 기습 남침한 것이다. 한국이 불참한 가운데에서,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전쟁이다.”

북이 먼저 침략했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왜곡시키는 좌파운동권은 이씨의 증언을 깊이 새겨들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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