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5] “왕과 신하의 논쟁… 누가 이길까”… ‘축수재’ 존폐 여부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5] “왕과 신하의 논쟁… 누가 이길까”… ‘축수재’ 존폐 여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0.11 13:50
  • 호수 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시대 절에서 행했던 축수재를 재현하고 있다. 축수재는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교행사였다.
고려시대 절에서 행했던 축수재를 재현하고 있다. 축수재는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교행사였다.

성종 “선왕께서 지내시던 것이라 혁파할 수 없다”

이심원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구하지 말아야 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왕이 오래살기를 비는 의식이 있었다. 축수재(祝壽齋)이다. 고려 때부터 신하들이 임금의 장수를 비는 불교행사로 조선 초까지 이어지다가 태종 11년(1411년)에 사라졌다. 태종은 “오래 살고 죽고는 운명에 달려 있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라며 축수재를 없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세조 1년(1455년)에 이 행사가 슬그머니 부활했다. 삼각산 승가사 등 여러 절에서 다시 축수재가 열렸다. 이로 인해 축수재 존폐 여부가 부각됐다. 본격적인 논의가 성종 때 있었다. 폐지를 주장하는 인물은 효령대군의 증손인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1454~1504년)이었다. 

성종 8년(1477년) 9월 9일 이심원은 성종과 축수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이심원: 축수재는 주상을 위하여 거행하는 것이라서 신하들이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구하지 말라’ 하였고, ‘제사 지내야할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시행한다면 근본이 튼튼해지고 나라가 편안해져 건강과 장수를 누릴 것이니 어찌 부정한 방법으로 복을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큰 덕을 지니면 반드시 걸맞은 지위를 얻고 반드시 장수를 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상이 좌우를 둘러보며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윤자운: 장수를 빌며 기도하는 것은 주상을 위하는 일이니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 해도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심원: 윤자운의 말은 틀렸습니다. 장수를 기원할 때에 식견이 있는 사람이 겉으로는 따르는 척해도 마음속으로는 잘못이라 여긴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선대왕 때부터 해 온 일이라도 도리에 어긋난다면 바로 고쳐야 하니 어찌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혁파하십시오,

성종은 고려해보겠다고 했지만 세조의 왕비 정희대비, 예종의 양모인 인혜대비, 생모인 인수대비 등 세 명의 대비들의 반대로 이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 11월 26일 이심원은 다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임금의 탄생은 실로 천명을 받은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주인으로서 욕망을 절제하고 언행을 바르게 하며 덕을 담아 정사를 행하고 억조창생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수고롭게 기도하지 않아도 재해가 사라지고 장수와 복이 올 것입니다…만약 부처의 힘을 빌려 성상의 수명을 하루 한 시각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신하의 마음으로는 자기 몸을 백번 바친다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금에 한 번도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 어찌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성종은 이 상소문을 읽고 이심원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다른 신하들의 생각을 물었다. 그 때 승지들이 이심원의 말에 그른 점이 없다며 두둔했다. 성종은 이심원을 불러놓고 표범가죽 한 벌을 하사하면 전교했다.

“축수재는 선왕께서 지내시던 것이기 때문에 감히 혁파할 수 없다. 세조는 선왕이 아니신가. 그대는 세종을 본받길 바라는가? 그대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앞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은 아뢰지 마라.”

그러나 이심원은 12월 2일 다시 차자(상소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간단하게 올림)를 올렸다. 세조가 예종에게 세상의 변천에 따라 일을 해 나가야 한다면서 부왕의 행적이라고 바꾸기를 꺼린다면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격이 된다’고 일러준 말을 인용했다.

경전의 글을 인용하는 등 집요하게 설득을 하자 마침내 성종으로선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성종은 “올바른 도리를 힘껏 진술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나를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내가 비록 무지몽매하지만 그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경의 의견에 따라 즉시 축수재를 혁파하겠다”라며 물러섰다. 

이심원이 24세 때의 일이다.  

사관은 이심원의 끈질긴 행적에 대해 “이심원은 독서를 좋아하고 옛 성현의 도를 흠모하여 유자를 만나면 반드시 성리의 연원에 대해 토론했다. 이단의 책을 찢어서 버리며 고상한 뜻을 품고 직언하니 사람들이 간혹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

비록 왕일지라도 신하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에 바탕을 둔 주장에 대해선 무시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