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6] 조선시대 ‘가사제’, “왕족들이 집 넓히려 백성의 집을 철거하다”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6] 조선시대 ‘가사제’, “왕족들이 집 넓히려 백성의 집을 철거하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0.24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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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 지도인 경도오부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 영조 7년(1731)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 한양 지도인 경도오부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 영조 7년(1731)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신분 따라 집터 크기, 내부 장식 규제… 통일신라에도 존속

중종 19명 왕자·옹주들, 신축·수리 빈발로 백성 원성 사

화려한 서까래 높은 용마루… 선왕 때 재상집은 ‘변소’인 셈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중종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여러 왕자가 법전을 무시하고 서로 사치스러움을 경쟁하며 집터 넓히기에만 힘쓰다 보니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고 끝내 유랑하게 됩니다.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집터를 넓히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억지로 땅을 사들이지도 못하게 하소서.”

조선시대에도 집을 주거의 목적이 아닌 과시와 사치의 수단으로 여기는 못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왕의 가족들과 사대부들이 이런 몰염치한 짓거리에 앞장 서 백성의 원성을 샀다. 여기서 경국대전에 의거해 집터를 넓히지 못하게 하는 법이 바로 ‘가사제’(家舍制)이다. 

가사제는 조선의 가옥 건축에 관한 규정으로 세종13년, 1431년에 도입됐다. 집터의 크기를 신분에 따라 규제했다. 1품에서 9품까지의 등급과 서민을 포함해 모두 10등급으로 신분을 나누고, 1품 35부(負)로부터 서민 2부까지 신분 별로 집터의 크기를 제한했다. 

부(負)는 면적의 단위로, 1부는 지금의 미터로 환산하면 133㎡ 정도이다. 따라서 1품의 집터는 4600㎡ 정도가 되고 서민의 경우 266㎡ 정도의 집터를 소유할 수 있다. 이 법령을 기초로 가사제한이 제정됐다. 왕의 형제인 대군의 집은 60간, 왕자와 공주의 집은 5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1440년(세종 22)에 개정된 법령에서는 대군의 경우 전체규모 60간 안에 누(樓)10간, 정침(正寢), 익랑(翼廊)을 두고, 주요구조부재의 치수를 제한하는 등 규제내용이 세분화됐다. 1449년(세종 31)의 개정에서는 누10간, 정침, 익랑 외에 서청(西廳), 내루(內樓), 내고(內庫) 및 사랑(斜廊)과 행랑(行廊)으로 규제대상 건물이 더욱 세분화됐다. 주요 구조부재의 치수도 전면간의 길이(間長)와 전후퇴간을 합친 길이(間前後退竝) 및 퇴기둥(退柱)의 높이 등으로 각 건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규제했다.

가사제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옥사조에 나타난다. 옥사조는 골품제도에 의해 엄격한 신분계급사회를 이뤘던 통일신라시대의 주택에 대한 규제 법령으로 834년(흥덕왕 9)에 교시됐다. 진골에서 백성에 이르는 각 신분 별 주택의 금제이다.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사제가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의 가사제는 건물의 규모, 건축 재료의 종류와 내·외부 장식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제한을 두었다. 

조선시대 4대문 안 풍경.
조선시대 4대문 안 풍경.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4대문 안쪽 구역으로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전체 및 종로구의 중심 지역을 포괄하는 정도의 크기이다. 서울특별시와 비교하면 자그마한 넓이지만 도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성의 크기는 한정된 가운데 도성 내 인구가 계속 늘다보니 점점 주거공간이 모자라는 문제가 생겼다. 특히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부와 지위를 이용해 크고 넓은 집을 지으려는 교만한 짓을 일삼았고 중종 때 극에 달했다. 

중종은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인순공주를 제외한 9남 10녀가 모두 혼인했다. 이렇듯 장성한 자녀가 많다보니 이들이 독립해 대궐 밖에 나가서 살게 될 가옥을 신축하거나 수리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어기면서 집터를 늘리거나 규정에 없는 건축물을 짓는 등의 폐단이 속출한 것이다. 그러자 규정을 벗어난 왕실의 가옥은 철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중종 22년(1527년) 5월에는 이러한 철거요청이 한 달 동안 무려 12차례나 있을 정도였다.

“돈의문 안에 새로 지은 옹주의 집터가 꽤 넓은데도 행랑 밖에 있는 평민 사랑손 등 6인의 집을 억지로 사들여 철거했습니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 탄식하고 있습니다(중종실록).”

하지만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중종은 신료들의 집요한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백성들도 감히 왕실을 상대로 반항할 수도 없어 꼼짝없이 집에서 내쫓겨야 했다. 폐단은 이뿐만이 아니다. 집을 철거하고 새집을 짓는 과정에서 백성의 고통이 심했다. 중종실록에 이런 기록도 있다.

“주상은 재위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선왕이 물려준 궁궐을 넓히거나 증축하는 일이 없었고 무너지고 파손된 곳이 있더라도 즉시 수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자와 부마들은 쉴 새 없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토목공사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에서도 이를 경쟁하듯 따라 해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써서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도성 곳곳에 즐비했다. 선왕 때의 재상집을 여기에 비교해 본다면 마치 변소처럼 보일 정도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 신료들은 대토지 소유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를 한껏 과시하며 사치풍조를 조장했다. 일부 부유층과 권력자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으로 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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