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2] 가을비 그 소소함에 대하여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2] 가을비 그 소소함에 대하여
  •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승인 2022.10.31 10:23
  • 호수 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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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그 소소함에 대하여

가을비가 소소히 내리며 서늘함을 보내오니

작은 창 아래 단정히 앉아 있는 그 맛이 깊고 깊도다

벼슬살이 시름 나그네 근심 모두 잊어버리고서

향불 한 심지 피워 놓고 햇차 한 잔 마신다네

秋雨蕭蕭送薄涼 (추우소소송박량)

小窓危坐味深長 (소창위좌미심장)

宦情羈思都忘了 (환정기사도망료)

一椀新茶一炷香 (일완신다일주향)

- 이색(李穡, 1328~1396), 『목은고(牧隱藁)』 2권「추일서회(秋日書懷)」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이 좋은 이유는 우선 선선한 날씨 때문이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그간 더위에 찌들었던 기분이 상쾌해진다. 또 가을의 높고 푸른 하늘이 좋다. 청명한 날씨의 가을 하늘 아래 단풍의 색채가 대비되는 풍광은 정말로 아름답다. 또 하나 가을의 매력을 꼽자면 바로 비가 올 때이다. 가을비의 매력을 잘 포착한 이색의 시가 있어 소개해 본다.

목은(牧隱)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는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관료이자 뛰어난 문장가이다. 위 시는 언제 지은 작품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宦情’, ‘羈思’와 같은 시어로 보아 타지에서 객살이를 하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 가을비가 내리는 모습을 ‘소소(蕭蕭)’하다고 표현하였다. 통상 번역할 때는 ‘쓸쓸하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蕭蕭’는 한자사전에서 ‘비바람 소리를 형용한 것’, ‘적막하고 고요한 상태’, ‘서늘하고 청량한 상태’ 등으로 풀이한다. 국어사전에는 ‘소소하다’를 ‘바람이나 빗소리 따위가 쓸쓸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蕭蕭’가 꼭 비 오는 모습을 형용할 때 쓰이는 것만은 아니지만 서늘하고 청량한 비가 요란하지 않게 내리면서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 참 잘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이색은 이 소소(蕭蕭)한 가을비가 주는 정취를 통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벼슬아치의 고뇌와 타향살이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나아가 향을 피워 놓고 햇차를 마시며 시절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색이 느낀 가을비의 ‘소소(蕭蕭)’함은 마냥 쓸쓸한 심상이 아니다. 즐겁고 기쁜 느낌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어둡고 암울한 상태에 가깝지만, 거기에는 무더운 공기가 사라진 기분 좋은 청량감, 시절의 변화에서 오는 세월의 무상함. 가을비의 무게감이 주는 적막과 고독, 그리고 차분함이 공존하고 있다.(하략)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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