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7] 권력에 굴하지 않은 조선 예술가, “숙종의 어진 그린 제가 어찌 그를 그리겠나”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7] 권력에 굴하지 않은 조선 예술가, “숙종의 어진 그린 제가 어찌 그를 그리겠나”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2.10.31 13:44
  • 호수 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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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어진을 그린 진재해의 ‘조영복 초상’. 조선의 사대부들이 몰살당한 신임사화의 주범 목호룡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나라의 명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의 어진을 그린 진재해의 ‘조영복 초상’. 조선의 사대부들이 몰살당한 신임사화의 주범 목호룡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나라의 명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임사화’ 주범의 초상화 그리라는 나라의 명 거절

신임사화, 노론·소론이 왕위계승문제로 벌인 당파싸움   

영조 “순종하지 않으면 화를 입을 텐데…‘기특하도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은 공신으로 책봉된 자에게 나라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제도가 있었다. 경종 때 지관 출신 목호룡(1684~1724년)은 역적을 고발해 토벌한 공로로 부사공신에 책봉됐고 ‘동지중추부사’의 지위에다 동성군(東城君)이란 훈작도 받았다. 동지중추부사는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종이품(從二品) 관직인 동지사(同知事)이다. 중추부는 조선시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堂上官)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당시 공신 책봉을 주관하던 녹훈도감에서 목호룡의 초상화를 화원인 진재해(秦再奚·?~1735년)에게 맡겼는데 그가 이 명을 단칼에 거절했다. 진재해는 “제가 이 손으로 숙종 임금의 어진을 그렸는데 어찌 차마 목호룡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진재해는 궁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인 도화서의 화원이다. 김홍도·신윤복도 도화서 화원 출신들이다. 이들은 문관이나 무관이 아닌 잡직에 속했으며, 신분상으로는 양반이 아닌 중인에 속했다. 그런 계층의 인물이 공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무얼까. 

그 사유를 알려면 1721~1722년 경종 때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이해해야 한다. 이 사화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것을 말한다. 신축년과 임인년에 일어나 그런 이름이 붙었다.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 균(후에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을 지지했다. 경종(1688~1724년)은 어머니 장희빈이 죽자 이상스런 병의 징후가 나타났다. 숙종이 이를 걱정해 이이명이란 신하를 불러 ‘정유독대’를 하기도 했다. ‘정유독대’란 숙종 43년 왕이 세자교체 문제를 이이명과 단독 대담을 통해 논의한 일을 지칭한다. 

경종이 이처럼 허약하자 경종 즉위부터 세자 책봉과 세자 대리청정 문제가 불거졌다(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사망). 이를 쟁점으로 노론과 소론은 극한 대립을 보였다. 1722년 3월 목호룡이 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을 고변했다. 삼급수설이란 칼로 살해(대급수), 약으로 살해(소급수), 모해해 폐출함(평지수) 등을 말한다.

이 고변으로 국청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노론 측 사람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다.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에 정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명이고 장형으로 죽은 자가 30여명이었다. 그들의 가족으로 잡혀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된 자가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했다. 목호룡은 이에 대한 공로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진재해가 초상화 요청을 거절한 배경이다. 뜻밖의 거절에 목호룡과 한패인 김일경(후에 이조판서를 지냄) 등이 수차례 공갈과 협박을 했으나 진재해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도화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사관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상 사람들은 송나라 상안민이 현명하다고 칭찬하지만 상안민은 이미 새긴 당비(黨碑)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한 것이 전부였다. 진재해가 끝까지 거절해 아예 손을 대지 않은 것과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낫겠는가. 옛날에 주자는 올바른 의견이 아랫사람에게만 나오는 것을 근심했는데 요즘은 올바른 의견이 신분이 미천한 화가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진재해는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조선의 사대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낸 목호룡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특히 신세를 많이 진 김창집(1648~ 1722년)의 초상화를 그린 손으로 역적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고 했다. 김창집은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영조는 즉위 직후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듣고는 “기특하고도 기특하도다. 이처럼 신분이 미천한 사람은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니 시속에 영합하고 권세에 빌붙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굳게 거절했으니 그 마음이 몹시 가상하다. 특별히 자급을 높여주고 해당 조에 분부해 근속 기간에 따라 적당한 직위에 임용하도록 하라”고 하명했다.

영조는 이어 신임사화를 재조사했고 목호룡의 무고로 노론 인사들이 누명을 뒤집어쓴 정황이 드러났다. 목호룡은 의금부에서 매를 맞다가 죽었고 그의 목은 당고개(唐古介·서울 용산구 신계동 일대)에 효수됐다.

진재해는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로 불렸다. 1700년부터 궁중행사에 화원으로 참여해 정6품 관직인 ‘사과’(司果)를 지냈다. 숙종의 어진을 그린 공로로 상현궁을 사여했고, 병조의 부호군 등을 거쳐 태안 근포첨사, 전라도 격포별장, 경상도 서생첨사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는 ‘잠직도’(국립중앙박물관), ‘조영복 초상’, ‘송시열 초상’(삼성미술관 리움) ‘월하취적도’(서울대학교 박물관) 등이 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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