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4] 문구점에 들러 원고지를 사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4] 문구점에 들러 원고지를 사며
  • 소상윤 KBS심의실 심의위원
  • 승인 2022.11.28 09:29
  • 호수 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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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점에 들러 원고지를 사며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이 사람됨으로 전해지는 것만 못하다.

傳之以文 不若傳之以人

(전지이문 불약전지이인)

- 한장석 (韓章錫, 1832~1894), 『미산집(眉山集)』       「미산선생문집(眉山先生文集)」 권10 〈분고지(焚稿識)〉


가을이다. 글을 쓰고 싶다. 계절이 가을이어서만이 아니라 인생도 가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젊음은 정들다 말고 떠나간 연인처럼 가버렸다.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떠나보낸 마음이다. 황망히 가버린 젊음의 뒷모습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꽤 오래된 듯하다.

한때 사람들은 작가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했다. 글 쓰는 재능은 특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모두가 재능은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글쓰기를 알려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분투할 것을 요구한다. 인터넷에는 글쓰기 비법을 알려주는 숨은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고, 6주 만에 책을 쓰거나 2주 만에도 작가가 될 수 있다. 더구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를 시작하면서 이들을 위한 글쓰기 강좌가 성업 중이다. 주위에서도 먼저 퇴사한 동기 몇몇이 벌써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판했다. 얼마 전에는 나도 비대면으로 글 쓰는 법을 알려주는 사이트와 온라인 자서전 플랫폼을 소개받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던 중에 만난 글이 바로 한장석의 〈분고지(焚稿識)〉다.

선생은 자신이 젊은 시절 쓴 글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 보니 부족한 마음이 들어 원고를 불에 태워버리고는 다시는 함부로 글을 남기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내용 중에 나오는 말이 바로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이 사람됨으로 전해지는 것만 못하다(傳之以文 不若傳之以人)’라는 글이다. 공자의 제자 안연(顏淵)은 한 편의 글도 남긴 것이 없지만 공자가 그를 인정하여 여러 현인 중 으뜸이 되었고 후세의 사람들도 이를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면서, 개인적인 욕심으로 글을 쓰는 것을 반딧불이와 횃불을 주워 모아 태양의 밝은 빛에 더하려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일갈한다.

이 가을, 부랴부랴 글 쓰는 법을 배워 자서전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이 글은 우선 멈추라고 말하는 듯하다. 급한 대로 온라인 플랫폼에 들어가 그 로직이 짜 놓은 대로 글을 쓰게 되면 부끄러운 마음에 나중에 불에 던져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 부끄러움이 어찌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겠는가. 모두 필생의 역작을 쓴다는 각오로 글을 써도 후세에 길이 전해질 책은 얼마 없을 텐데 6주 만에 책을 쓰고 2주 만에 작가가 된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모든 별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밤하늘의 별들이 천체를 운행하며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내듯 우리들 한 명 한 명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을 테니 조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 듯하다. 사람이 먼저 되면 글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밤톨이 스스로 벌어져 툭 하고 지상에 떨어지듯 글도 그렇게 내 안에서 벌어질 것이다. 혹시 글이 나를 따라오지 않더라도 사람됨만 제대로 된다면 그건 그대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소상윤 KBS심의실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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