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肉筆 여담”
[백세시대 / 세상읽기] “肉筆 여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1.09 11:05
  • 호수 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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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글씨가 예쁘다”, “젊은 사람 글씨 같아.”

올해 대통령 연하장을 접한 이들이 하는 말이다. 대통령 연하장의 글씨에선 정숙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새해를 맞아 각계 원로, 주요 인사, 국가유공자 등에게 신년 연하장을 발송했는데 그 글씨체가 칠곡할매글꼴이다. 이 글씨체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한글을 막 깨우친 70대 후반에서 80대 후반의 시골 할매(할머니의 사투리)들이다. 국가 기관에서 글꼴로서 인정한 건 예술성과 독창성, 공공성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는 얘기인데 어떻게 해서 시골 할매의 글씨가 그 반열에 올랐을까.

칠곡할매글꼴은 칠곡군이 지역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성인문해교실을 통해 탄생했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깨친 할머니들이 쓴 글씨를 보존하기 위해 2년 전 개발돼 세상에 선보였다. 칠곡군은 당시 할머니들이 쓴 글씨 400개 중 5명의 글씨체를 뽑았다. 그들은 통일된 글꼴을 만들기 위해 4개월간 각각 2000여장에 이르는 종이에 글씨를 써가며 연습했다. 어르신들이 하기엔 쉽지 않은 고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한 어르신은 “영어나 특수문자가 어려웠지만 손주들이 도와줘 나중에는 잘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 글꼴은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정식 탑재됐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글꼴을 휴대용저장장치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했다.

요즘은 육필을 보기 힘든 시대이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연필과 펜, 만년필 등으로 글씨를 썼다. 후에 나타난 볼펜도 처음엔 미끌미끌한 촉감 때문에 외면당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손으로 꾹꾹 눌러써야 글 쓰는 맛이 있다고 느꼈으리라. 작가 최인호(1945~2013년)는 평생을 원고지에 볼펜으로 글을 썼다. 글씨들은 주인의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 삐뚤빼뚤하고 뭉개져 있었다. 신문사에 ‘최인호 원고’를 따로 보는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 ‘칼의 노래’, ‘하얼빈’ 등의 저자 김훈도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로 쓴다.

지금의 노인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 책가방 안에는 으레 잉크병이 들어 있었고,  교복과 책가방 귀퉁이에 잉크가 번져 있기 일쑤였다. 교실 책상 위에도 교과서와 함께 펜과 잉크병이 나란히 올라가 있었다. 수련장처럼 생긴, 글씨 연습하는 펜글씨본을 따로 팔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남자와 여자가,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이 달랐다. 성격 면에서도 차이가 났다.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은 큼직하고 강한 반면 내성적인 사람은 글씨도 비교적 작고 얌전했다. 

학급마다 글씨를 잘 쓰는 친구들이 서너 명씩 있게 마련이다. 잘 쓴 글씨를 보면 시샘을 내기도 하고 은연중에 모방하기도 했다. 교사 중에는 그날 가르칠 내용을 칠판 가득히 적곤 했는데 이 일을 제자에게 맡겼다. 글씨를 잘 써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 받은 학생은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관공서, 회사, 학교 등에 제출하는 서류도 모두 육필이었다. 특히 입사서류 중 하나인 이력서의 글씨는 지원자의 인성과 성품 등을 판단하는 자료로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잘 쓴 글씨는 기본점수를 먹고 들어갔다. 글씨에 자신이 없는 이는 부모, 친지에게 이력서나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칠곡의 어르신들은 대통령 연하장에 자기들의 글씨체가 사용됐다는 소식에 “인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70,80 넘어 한글을 배워 글씨를 쓰고 읽을 수 있게 된 사실만도 가슴 벅찬 일인데 임금의 서신에 자기 글씨가 쓰여졌다니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이분들이 오늘의 기쁨과 보람을 만끽하기까지 대한노인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칠곡군지회(지회장 임의도)의 행복도우미들이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한글 수업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경로당 회원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보다 뒤늦게 한글을 익힌 무학의 할머니가 한글을 더 잘, 더 아름답게 쓴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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