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5] 조선의 못 다 핀 운하 “중국은 500리 운하도 팠는데 고작 20리를 못 뚫으랴”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5] 조선의 못 다 핀 운하 “중국은 500리 운하도 팠는데 고작 20리를 못 뚫으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1.20 13:29
  • 호수 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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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반도 굴포에는 지금도 운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태안반도 굴포에는 지금도 운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쌀 실어 나르던 조운선 태안 앞바다서 자주 침몰하자 

태안읍 인평리서 서산시 팔봉면 사이 운하 건설 시도 

결국 실패, 대안으로 안면운하 뚫어…안면도 생긴 배경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운하에 대한 갈망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전 국토에 운하를 뚫어 배로 유람하겠다던 어느 대통령의 꿈(?)처럼 조선도 운하를 통해 안정적인 물자수송의 꿈을 이루려 했다. 전라도에서 생산한 쌀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세곡(歲穀) 운반선인 조운선이 태안반도 앞 안흥량을 지나다 빈번히 조난을 당해 귀한 쌀과 인명의 피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천수만에서 서산시 팔봉면의 가로림만까지 운하를 개통하고자 했다. 안흥량은 복잡한 해안선과 암초, 거센 물살로 악명 높았다. 실제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기록이 많다. 요즘도 바다 밑에서 난파된 배가 발견되어 ‘난파선의 무덤’이라 불린다. 난파선에서는 고려청자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134년 고려 인종 때였다. 인종은 내시 정습명을 내려 보내 인근의 장정 수천 명을 동원해 운하를 파도록 했다가 바로 포기했다. 땅이 단단해서 파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조운선들이 계속 침몰하자 1412년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이 팔을 걷어붙였다. 예조좌랑을 지낸 하윤이 묘안을 짜내 갑문식 운하를 제안했다. 칸막이 형태로 제방을 쌓아 각기 수위를 달리하고 배들을 배치해서 릴레이식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방식이다. 여론은 비관적이었지만 태종은 강행했다. 병조참의 우박을 공사 책임자로 임명해 굴착 공사를 시작했다. 5000명을 동원해 시작한 공사는 한 달 여 만에 끝났다. 입구와 출구에 해당되는 천수만과 가로림만에 배들이 정박지로 쓸 수 있는 큰 호수를 파고 축대를 쌓은 다음 운하를 뚫었다. 그렇지만 실용성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운하 폭이 작아 큰 배들이 이용하기가 불편했다. 큰 배가 운하를 통과하지 못해 배에서 짐을 내려 작은 배에 옮겨 싣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힘들게 판 운하는 써먹지도 못하고 배들은 다시 험난한 태안반도 앞바다를 통과해야만 했다. 

일방적이고 즉흥적인 결정과 충분한 검토 없는 실행은 돈과 인력의 낭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토목공사였다. 이명박 정부가 이때의 일을 교훈 삼았다면 이 시간까지 국론분열을 야기하는 4대강 개발 따위의 정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운하 지도. 위쪽은 원래 건설하려던 굴포운하이고. 아래쪽은 대안으로 판 안면운하인 백사수도이다.

운하 얘기가 다시 나온 건 대형 해상조난사고 때문이었다. 1414년 8월 4일 전라도에서 올라오던 조운선 66척이 태풍을 만나 침몰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여명이 익사했고 쌀과 콩을 비롯한 곡식 5800석이 물에 잠겼다. 

세조는 1461년 좌의정 신숙주를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해 운하를 만들도록 명을 내렸다. 신숙주는 “땅이 너무 물러 파는 족족 허물어지니 운하를 파지 않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세조는 이 보고를 받아보고 포기했다. 이어 1522년 중종 때 삼도제찰사 고형산이 장소를 조금 이동해 운하를 파자고 한 제안에 따라 착공했으나 이도 반대여론 때문에 중단됐다. 대신들도 운하를 파자는 쪽과 불가하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중종은 다시 1536년 9월 1일, 이현이란 사람을 현지에 내려 보내 좀 더 손쉽게 팔 수 있는 지형을 찾도록 했다. 태종 때 운하를 ‘굴포운하’, 이현이 만든 것을 ‘의항운하’라고 부르는 이유다. 원로대신들도 “중국은 500리나 되는 운하를 뚫는데 우리가 고작 20리 밖에 안되는 운하를 못 뚫을 이유가 없다”며 힘을 실어줬다. 

운하 공사에 승려들을 대거 동원해 순조롭게 공사가 끝났지만 이것 역시 흙이 메워지면서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뒤이어 현종이 몇 차례 사람들을 현장에 내려 보내 실사를 지시했으나 이전의 왕과 대신들이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는 등 비관적인 보고를 내놓아 흐지부지 됐다. 결국 1134년(고려 인종 12년)에 착공하여 1669년(조선 현종 10년)까지 535년 간 간헐적으로 공사가 이어지다 전체 7㎞ 중 4㎞만 개착되고 나머지는 완공하지 못했다. 

운하 꿈이 반쪽이나마 실현된 건 아전 방경잠의 아이디어 덕이었다. 그는 당시 충청감사 김육(1580~1658년)에게 태안반도를 가로지르는 대신 남쪽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의 좁은 육지를 파내 연결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의 제안대로 공사를 시작해 완공을 보았다. 원래의 굴포운하가 아닌 새로운  안면운하인 ‘백사수도’(白砂水道)이다. 이때 좁은 구간을 파내면서 육지와 떨어진 남쪽의 안면곶은 안면도라는 섬이 됐다. 지금의 안면도가 만들어진 배경이기도 하다.  

후대 사람들은 운하 실패의 원인을 ▷화강암 등 단단한 기반암 ▷조석 간만의 큰 차이와 연안의 낮은 수심 ▷공법과 공구의 낮은 수준 등을 꼽고 있다. 예컨대 운하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 대부분이 농사꾼들이라 토목공사에 숙련되지 않았고, 연장도 끌, 정 정도의 원시적인 차원의 공구였다는 얘기다. 

현재 유적지로 남아있는 굴포운하의 밑바닥 너비는 약 19m, 상층부의 너비는 52m,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 제일 높은 곳이 50m이다. 여기서 굴포(堀浦)란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판 도랑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일부러 판 강이나 시내를 말한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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