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7] 조선의 변호사 ‘외지부’, “민간서 활약한 법률 전문가…소장 써주고 변론도 맡아”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7] 조선의 변호사 ‘외지부’, “민간서 활약한 법률 전문가…소장 써주고 변론도 맡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2.13 13:48
  • 호수 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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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 수록된 그림.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아에 소장을 제출하는 모습 담겨 있다. 	자료=국립중앙박물관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 수록된 그림.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아에 소장을 제출하는 모습 담겨 있다. 자료=국립중앙박물관

‘송사 부추기고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는 자’(성종실록)  

 시간 많은 종실과 결탁해 물의 일으켜 성종이 변방으로 축출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경명군 이침은 외지부를 끌어다 자기 집에 모아놓고 송사하기를 좋아하니 심히 좋은 일이 못됩니다. 사천수 이호원은 해마다의 수교(受敎·임금이 내리던 교명)를 능히 꿰뚫어 외우고 있으므로 비리로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외지부 노릇을 합니다.”

조선시대 중종실록에 나온 기록이다. 이침은 성종의 아들이고, 이호원은 태종의 증손이다. 여기서 외지부(外知部)는 ‘송사를 판결하는 아문에 오래 버티고 있으며 사람들을 부추겨서 다투어 소송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이다. 오늘날의 변호사와 같은 존재이지만 당시에도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만은 않은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노비 문서와 노비 관련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隷院)이란 기관이 있었다. 당시의 부(富)는 토지와 노비의 수에 달렸으므로 이 관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 기관에 속하지도 않은 중인이 장례원 밖 민간에서 법률 전문가로 통하며 송사를 일으키고 변론 등을 맡아 재판을 흔드는 일을 해 ‘외지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법률지식을 갖췄고 한문문서작성에 능했다고 한다.

성종실록은 “무뢰배가 송정에 오래 버티고 있으면서 혹은 품을 받고 대신 송사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부추겨 송사를 일으키게 하여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며 옮고 그름을 뒤바꾸고 어지럽게 하니 시속에서 이들을 ‘외지부’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이침과 이호원이란 사람은 모두 종실(宗室)에 속한다. 종실은 과거를 볼 수도, 관원으로 재직할 수도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이권에 개입해 송사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일이 언제든지 가능했다. 외지부가 권력과 결탁한 배경이다. 

조선 초기에는 재판이 빈번했고 잘 끝나지도 않았다. 오늘날과 같이 민사와 형사가 구분돼 있지도 않았고 3심제나 헌법재판소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도 없어 재판은 무한정 진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상속문제이다. 아버지의 재산을 놓고 본처와 후처의 자식들 간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본처와 후처의 경계도 모호했다. 첫 번째 결혼한 부인을 정식부인으로 하고 두 번째 부인을 첩으로 인정하면 간단할 테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나중에 결혼한 부인의 집안이 더 부유한 경우가 많아 입김이 셌고, 재판에서 패해 첩으로 인정되면 출세에 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좀처럼 승복하지 않았다. 

태종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남편이 더 사랑한 쪽을 정식부인으로 정하고, 재산은 공평하게 나누라는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왕명이 내려졌지만 집안마다 상황이 달라 재산 상속을 놓고 벌어지는 재판은 끊이지 않았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 ‘이복형제의 어머니가 종이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거나 문서를 위조하는 등 모함과 무고가 줄을 잇기도 했다. 여기에 자존심 문제까지 더해져 오늘날에 벌어지는 법정 공방 못지않은 난타전이 벌어졌다. 

양반 노릇을 하려면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재산이 필수였다. 때문에 자식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야 했다. 조선시대 재산목록 1호는 노비였다. 노비는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재물을 바쳤고, 결혼해 자식을 낳으면 주인의 재산이 느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래서 재산 관련 소송 중에는 노비 문제로 인한 소송이 가장 많았고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관리가 출석을 많이 한 쪽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노비와 관련된 소송에서 이기려면 도관에 매일 나와서 명단에 서명을 해야 한다. 소송을 제기하고 30일이 지났는데도 한쪽이 15일 동안 도관에 나오지 않으면 다른 자에게 노비를 준다.” 

도관(都官)이란 형조에 속한 관청으로 노비 소송 문제를 처리했다. 여기에 종사하는 관원은 종3품의 고위직이었다. 재판 당사자가 한양에 살지 않거나 생업에 종사하면 매일 관청에 나가는 일이 고역이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고 낯선 타지에서 생활하다 병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재판 출석일이 부족해 자신의 노비인데도 눈뜨고 빼앗기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 외지부들이 끼어들었다. 외지부들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소송 관련 서류를 관청에 대신 접수해주거나 친척이라고 해서 대신 재판정에 나타나곤 해 재판을 승소로 이끌곤 했다.

이 같은 폐단이 속출하자 해당 관청에서 먼저 재판에 많이 나오는 쪽이 이긴다는 규정을 없애달라고 요청했고 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외지부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소송의 문을 열어두었지만 소장을 한문으로 써야 해 아무나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 일을 외지부가 대신 해준 것이다. 외지부는 문맹의 백성을 대신해 소장을 써주고 변론도 맡아 재판을 이기게 함으로써 약자의 피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외지부가 사라지게 된 건 양반층의 견제 때문이었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백성들을 부추겨 번거로운 소송을 제기하게 만든 이들이 높은 사람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1472년 신숙주와 한명회는 성종에게 백성들을 현혹하는 외지부들을 처벌할 것을 고했고, 이에 따라 한양의 외지부들이 모두 함경도 변방으로 추방됐다.  

그런데 연산군 때 외지부 16인을 변방으로 내치라는 명령이 보이고, 외지부를 고발하는 자에겐 1명 당 면포 50필을 포상하고,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장 100대에 처벌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보면 이후에도 외지부의 잔재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변호사들은 사회에 있어선 안 될 악인 한편으로 무지한 백성의 입장에선 재산과 권익 보호의 울타리 같은 존재였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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