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맨발의 탁본
[디카시 산책] 맨발의 탁본
  •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 승인 2023.02.20 11:10
  • 호수 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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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탁본

공중의 거처를 잠시 지상에 박제해 놓고

심심한 바람이 탁본을 뜨면

모래알 속 지난날들이 발굴된다

 

사라진 발들의 휘파람 같은 것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다가 우연히 새 발자국을 발견한다. 처음 새들이 지나갈 때는 분명 발자국이 모래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수없이 모래 알갱이를 날려 보내고 나면 결국 새들의 발자국은 고생대부터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는 화석처럼 보이고 어쩌면 그걸 바람이 탁본을 뜨는 것만 같이 보이게도 된다. 그건 새들의 지난날을 다시 소환해 내는 발굴 현장을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행운을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생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사라진 존재에 대한 쓸쓸함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건 휘파람처럼 긴 여운을 홀로 느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닷물이 휩쓸어버리지 않고 수천 수만 번의 바람이 아주 천천히 한 존재를 이 지구상에서 온전히 지워버리지 전까지 우리는 저 맨발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지라도 그렇게 존재는 기억 속에 각인되고 탁본으로 전해진다.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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