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8] 사육신 박팽년 후손이 지은 ‘삼가헌’, “멸문 직전의 가문 구한 며느리 지혜 담겨 있어”
[인문학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28] 사육신 박팽년 후손이 지은 ‘삼가헌’, “멸문 직전의 가문 구한 며느리 지혜 담겨 있어”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2.20 13:55
  • 호수 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현전 학사 박팽년의 후손이 살고 있는 대구 달성군의 고택 삼가헌. 	사진=한국관광공사
집현전 학사 박팽년의 후손이 살고 있는 대구 달성군의 고택 삼가헌. 사진=한국관광공사

단종 복위 실패로 후손 끊길 위기에 처한 박팽년 가문 

아들 낳은 며느리가 종의 딸과 바꿔치기로 명맥 이어 

1769년 초가로 출발해 4대에 걸쳐 완성된 조선 주택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삼가헌(三可軒)이란 고택이 있다. 이 오래된 한옥에 얽힌 사연이 특별하다. 이 고택엔 박팽년의 후손이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조선 세조 때 고위직을 지낸 박팽년(1417~1456년)은 17세에 생원이 되고 2년 뒤 문과에 급제했다. 1447년 중시에 합격해 호당(湖當·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제공한 특별 휴가)에 선발되기도 했다. 

박팽년은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ㆍ이석형ㆍ정인지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 등 쟁쟁한 이름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박팽년은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부탁받았던 고명 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문종은 병환이 나자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며 술을 내려 주었다. 

박팽년은 문종의 말을 잊지 않고 수양대군에 맞서 어린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사전에 발각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옥중 사망했다.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그의 아버지 박중림과 형제 인년, 기년, 대년, 영년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아들 헌과 순도 죽임을 당했다. 여자들은 종으로 전락해 멸문에 이르렀다. 

그런데 둘째 아들 순의 부인 성주 이씨가 당시에 임신 중이었다. 관노로 갈 바에는 친정아버지가 달성현감으로 있는 경상도로 보내달라는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대구로 갔다.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조정에선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고 했으나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꿔치기해 순의 아들은 목숨을 구했다. ‘선조실록’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조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한 뒤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이었기에 죽음을 면했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 도움으로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박비는 외조부 아래서 성장했다. 성종 때에 이르러 사육신에 대한 면죄가 이뤄져 박팽년은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박비도 자수해 사면을 받았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성종 대에 이르러 박순의 동서 이극균이 경상감사로 와서 열일곱 살이 된 박비를 불러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길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조정에 숨기는가”하며 자수시켰다. 왕이 ‘오직 하나뿐인 산호 같은 귀한 자식’이란 뜻으로 ‘일산’이란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박비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순천 박씨 일가가 대를 이어 살게 됐다. 지금은 30호 정도가 남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300호가 넘을 정도로 번창했다고 한다. 이후 박비는 박일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가 할아버지 박팽년을 기려 세운 사당이 ‘육신사’의 발단이 됐다. 묘리에 위치한 육신사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박팽년의 부친 위패도 모셔져있다.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박팽년의 11세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삼가헌 박성수(1735~1810년)는 1769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인 삼가헌을 당호로 삼았다. 삼가헌은 중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도 있고(지),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인),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용), 중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삼가(三可)라는 말이 유래했다. 삼가는 선비가 갖추어야할 세 가지 덕목 ‘지·인·용’(知·仁·勇)을 뜻한다. 고택에 걸려 있는 편액은 추사 김정희와 함께 당대의 명필로 통한 창암 이삼만(1770~1847년)의 휘호이다. 전라도 도처에 그가 남긴 편액이 많다.

삼가헌은 선비의 긍지와 염치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민간에만 허용됐던 방주(사각기둥)가 아닌, 궁궐과 서원, 사당 같은 곳에만 허용한 원주(두리기둥)를 썼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중문에 초가지붕을 얹어 선비의 체통이 염치를 알고서야 반듯하게 선다는 의미를 상징했다.

박성수는 삼가헌 옆에 네 칸 크기의 마루와 온돌이 혼합된 형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파산서당’을 지었다. 이후 1874년 14대손 박규현이 연못을 파고 서당을 부분적으로 개조해 ‘하엽정’이란 별당을 만들어 오늘날과 같은 삼가헌을 완성했다.  

1979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가헌은 대문채·사랑채·안채·별당채로 나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타난다. 담 너머로 연못과 하엽정이 있다. 박규현은 삼가헌에 회화나무, 상수리나무, 가래나무 등 많은 수목을 심었다. 높이 2m 정도의 하엽정에 올라서면 연못에 가득 핀 연꽃과 함께 조선시대 주택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4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한 삼가헌에는 570여년 전, 박씨 가문을 잇기 위한 현명한 며느리의 지혜와 후손들의 눈물겨운 효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