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0] 최부의 ‘표해록’, “궁궐 문마다 두 마리 큰 코끼리가 지켜… 매우 기이해” (下)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0] 최부의 ‘표해록’, “궁궐 문마다 두 마리 큰 코끼리가 지켜… 매우 기이해” (下)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3.13 14:15
  • 호수 8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세기 중국 여성들.
14세기 중국 여성들.

남녀 모두 경대와 빗·솔 몸에 지녀…서주 여성 몸 팔기도 

사람 죽으면 그대로 물가에 버려 성 주위에 백골 수북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1488년 조선 성종 때 문신 최부(1454~1504년)가 쓴 표해록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중국 여행서로 평가 받고 있다. 최부는 도주한 노비를 수색하는 임무를 띠고 제주에 파견돼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했다. 1488년 1월 3일, 일행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 나주를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 끝에 중국 영토에 표착했다. 설상가상으로 해적을 만나 가진 옷과 식량 등을 빼앗기고 목숨을 위협 받기까지 했다. 최부는 표해록에서 당시 상황을 왕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해적이)신의 머리채를 끌고 결박해 거꾸로 매달아 놓은 뒤 신의 목을 가리키면서 작두를 대고서 배려고 했습니다. 칼이 마침 오른쪽 어깨 모서리로 잘못 내려가는 바람에 칼날이 뒤집혀 위로 가게 되었습니다. 도적이 또 칼을 대고 장차 신의 목을 베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도적이 와서 칼을 잡은 팔을 붙잡고 이를 막았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신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애원했습니다. 도적 괴수가 갑자기 신의 몸을 짓밟으며 우리 뱃사람들을 무섭게 협박하고서는 그 무리를 이끌고 나가면서 신이 탄 배의 돛도 끊어버리고 상앗대 등 여러 항해 도구를 바다로 내던져 버렸습니다(중략).우리는 다시 끝이 없는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최부는 1월 16일, 중국 임해현에 닿았고 그곳 사람들에게 조선 관리의 신분을 확인 받고 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이송되게 됐다. 강남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소주에서 보고 느낀 점을 이렇게 기록했다.

“소주에는 선비들이 못과 숲에 모여든 고기와 짐승처럼 많습니다. 바다와 뭍의 진귀한 보물들과 비단, 금·은, 구슬들과 온갖 장인과 재주꾼들로 부유하고 큰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듭니다. 강남에서도 소주와 항주를 제일가는 고을로 여겼습니다. 저자 가게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그득 퍼져 있으며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누대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4월 20일, 최부는 북경 자금성에서 중국 황제 홍치제를 알현하게 됐다. 최부는 상복을 입은 채로 알현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자 중국 관리가 “당신이 빈소 옆에 있으면 당신 아버지가 더 중하오. 그렇지만 여기 북경에 있으니 황제가 있음을 알아야 할 뿐이오”라면서 평민이 입는 갈복으로 갈아입고 알현하고 나와서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기를 권했다. 최부는 결국 관리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다음은 표해록에 기록된 황제 알현 장면이다.

“황제가 있는 성의 바깥문 빗장이 열렸고 늘 조회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물고기가 줄줄이 묶여 있듯이 가지런히 들어갔습니다. 신은 일의 형세가 긴박하므로 갈복으로 갈아입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층 문과 2층으로 된 두 큰 문을 지나서 들어가자 또 2층 큰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오문이었고 군사들의 위엄이 엄정했으며 등불의 빛이 눈부셨습니다. 저는 뜰의 가운데 앉혀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문의 왼쪽에서 북을 울렸습니다. 북소리가 끝나자 오문의 오른쪽에서 종을 울렸고 종소리가 끝나자 세 개의 무지개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문마다 두 마리의 큰 코끼리가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고 컸습니다. 동틀 무렵 조정의 관리들이 차례로 반열을 지어 섰습니다. 관리는 저를 이끌고서 조정 관리의 반열에다 세웠고 다른 무리는 국자감 생원들의 뒤에 세웠습니다. 다섯 번을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린 뒤에 단문을 통해 나왔고 다시 승천문으로 나왔습니다. 또 동쪽으로 가서 장안문의 왼쪽 문으로 나와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안 거리를 지나 숙소인 옥화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최부는 운하 운용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배로 다리를 만들어 강물을 가로질러 큰 부교를 만들었는데 다리의 위아래로 돛대들이 나뭇단처럼 가득했습니다. 다리 사이에서 두 개의 배를 빼내고서 왕래하는 배들을 소통시킵니다. 배가 다 지나가면 빼낸 배들을 되돌려 놓아 다시 다리가 됐습니다(중략). 황제는 땅의 형세가 남북으로 높고 낮음이 일정하지 않고 물 흐름이 나뉘어 비축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책이 못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갑(閘·갑문)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혹 5~7리마다 갑 하나, 혹 십 몇 리마다 갑 하나를 두어 물을 고이게 하고서 배를 건너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물의 연원이 마르지 않습니다.” 

최부는 표해록 말미에 중국의 강남과 강북의 사람 사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이 출간한 최부 표해록.
‘지식을만드는지식’이 출간한 최부 표해록.

 

“양자강이 남과 북을 나눕니다. 강남의 부녀자들은 문밖으로 나오지 않고 모두 붉은 누각에 올라가서 발을 걷고서 멀리 내다볼 뿐입니다. 그러나 강북에서는 밭을 갈거나 배의 노를 젓는 힘든 일에 모두 스스로 노동을 했습니다. 서주(徐州)와 임청 등지에서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몸을 팔고 돈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중략). 강남에서는 얼굴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남녀 모두 경대와 빗과 솔 등의 물건을 갖고 다닙니다. 강북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강남의 시장에서는 금과 은을 사용하고 강북에서는 동전(구리돈)을 씁니다. 강남에서는 시장 아이들이 주석으로 팔을 둘렀으나 강북에서는 납으로 코를 뚫었습니다. 강남에서는 농업과 공업과 장사에 힘을 들이지만 강북에서는 놀고먹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강남에서는 길을 다닐 때에는 수레를 이용하지만 강북에서는 혹 말을 타거나 혹 나귀를 탑니다. 그 말은 용처럼 큽니다. 강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큰 부자 집안에서는 묘당을 세우거나 정문을 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사람들은 대략 관을 써서 묻지도 않고 물가에다 버립니다. 그러므로 서흥부 성 변두리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습니다.” 

이 글은 ‘최부 표해록’(김지홍 옮김·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발췌한 것임.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