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 MC 송 해
전국노래자랑 MC 송 해
  • 관리자
  • 승인 2006.08.2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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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명·해학이 넘치는 ‘서민의 오빠’ 갈채

출연자들 짓궂어도 호쾌한 웃음으로 넘겨
2003년 평양노래 자랑 통해 실향의 한 달래

 

일요일 정오. 느긋하게 휴일 게으름에 빠져 드는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어김없이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러분 안녕하세여~, 다시 한번! 여러분 안녕하세여~! 전국노래자랑 송 해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17년. 우리 곁에는 늘 ‘젊은 오빠’ 송 해(79)가 있었다. ‘서민의 오빠’ ‘국민의 딴따라’ ‘국민 MC’ 송 해는 늘 꾸밈없이 수수한 모습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와 해학으로 풀어주고 있다.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지고, 만나다 보면 정을 느낀다는 송 해. 흔들림 없이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도 그 정과 신명난 해학 때문이었다.

 

지난 4월 5일 식목일 유난히 따뜻했던 봄날, 전국노래자랑 서울 금천구편 녹화장소인 금천체육공원에서 만난 송 해씨. 청바지와 청재킷 차림으로 공원을 거닐며 잠시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여느 어르신과 꼭 같았다.

 

 대중 앞에 서는 연예인은 먼발치서도 눈에 띄기 마련이건만 하마터면 노래자랑 구경나온 어르신들 사이에 묻혀 알은체도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 그만큼 서민적인 송 해씨다.

 

녹화 준비로 바쁠 법도 한데 그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베테랑은 달랐다. 일, 이년도 아니고 17년이란 세월을 지켜 한 무대에 서기가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는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녹화 전날 미리 내려가 이름난 명소도 찾아가 보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로움을 스스로 찾아 일이 아닌 ‘유람’이라 여긴다.

 

전국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그 고장에 닿기까지는 평균 3년 반. 그 사이 작은 시가 광역시에 편입되기도 하고, 없던 지명이 새로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기 마련. 녹화 전날 미리 도착해 시장 상인들의 표정과 말씨를 익히고, 슬렁슬렁 시가지를 산책하며 그 고장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하는 버릇도 그래서 생겨났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 고장 사람들과 소통해야만 정이 느껴지고, 그런 다음에야 무대에 섰을 때 신명난 해학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사나흘씩 객지생활을 해야 하지만 ‘젊은 오빠’를 진심으로 환대하는, 마음 푸근한 주민들이 있기에 힘든지도 모르고 17년을 버텨왔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출연자 가운데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끌어안고 뒹굴다 다친 사람도 있었다. 충북 청주에서는 열 살 난 아이가 “이 담에 다시 오라”는 송 해씨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돌렸다가 18살 청년이 되어 다시 그를 찾기도 했다. 송 해씨에게는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할머니, 아줌마, 아가씨 구분도 필요 없이 기습적으로 당하는 ‘볼 뽀뽀’는 사고( )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지역주의를 깨자며 경상도 출신 며느리가 전라도 시어머니와 함께 출연해 박수를 받았던 일, 시각 장애인이 ‘노래가 곧 눈’이라고 말해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신 일, 직업 귀천을 따지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대장장이 등 기억에 남는 출연자도 한 둘이 아니다.

 

출연자들이 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음식을 먹여주고, 행진을 시키며 짓궂게 굴어도 호쾌한 웃음과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화답하는 모습에서는 차라리 ‘성자’(聖者)의 단편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출연자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새록새록 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는 송 해씨. 하지만 매주 예심에 몰리는 1,000여명 가운데 15~20명의 본선 진출자를 가리는 일이 때론 가슴 아픈 ‘고역’이 되기도 한다. 본선에 나가게 해 달라고 애타게 조르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송 해씨가 이토록 사람 살아가는 정에 배고파하는 이유는 역사가 갈라놓은 그의 애통한 운명 때문이다. 그는 1927년 연백평야가 자리한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23살 되던 해에 전쟁이 터졌고, 이듬해 1·4 후퇴 때 해주항에서 해군 상륙정에 몸을 싣고 혈혈단신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으며 가까스로 도착한 인천항. 복희(福熙)라는 본명을 내리고 바다 해(海)자를 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전쟁을 피해 가족과 헤어지는 고통을 감수한 채 피란길에 올랐건만 그 고생의 끝은 전쟁이었다.

 

송 해씨는 대구 육군본부 통신부대에 배치되어 통신하사로 3년8개월을 근무했고, 휴전협정 사실을 암호로 만들어 전 육군에 타전한 장본인이 됐다.

 

송 해씨는 ‘국민 딴따라’임을 자처한다. 그렇게 불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딴따라’ 인생은 1955년 제대하자마자 ‘창공악극단’ 가수로 데뷔하며 시작됐다. 이후 송 해씨의 본격적인 유랑생활이 시작됐다.

 

건강이 극도로 쇄약해진 40대 초반에는 돌보는 사람도 없이 덜렁 병원에 남겨져 애절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밀려오는 고독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쓴 맛이 있으면 단 맛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송 해씨를 괴롭히던 인생의 곡절은 지난 2003년 8월 광복특집으로 제작된 ‘특별기획 평양 노래자랑’을 통해 다소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평소 지인들에게 ‘남북 통일노래자랑 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곤 하던 송 해씨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해 8월 11일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열린 노래자랑에는 11세 소년부터 77세 할아버지까지 20여명의 북한 주민들이 참가해 ‘눈물 젖은 두만강’ ‘고향의 봄’ 등 남쪽 노래와 ‘여성은 꽃이라네’ ‘평양냉면 제일이야’ 등 북한 생활가요를 열창했다.

 

이날 녹화된 노래자랑은 광복절 당일 남쪽의 KBS와 북한 조선중앙TV에서 동시에 방송돼 역사에 길이 남을 뜻 깊은 행사가 됐다.

 

“북측 방송원 전성희씨가 ‘평양~’하고 선창한 뒤 나와 관객들이 동시에 ‘노래자랑!’을 외칠 때는 정말 가슴 뭉클했지요. 1998년 금광산 관광 갔을 때는 KBS 관계자라는 이유로 북한 땅을 밟지 못했는데 월남자가 평양 한 복판에서 노래잔치를 진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송 해씨는 당시 77세로 최고령 출연자였던 이춘봉씨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송 해씨는 “내가 한 살 적은 것을 알고는 ‘내 동생이네’라고 말씀하셔서 50년 전에 헤어진 형님을 뵌 것 같아 감회가 남달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송 해씨는 “무대에서 쓰러지는 날이 전국노래자랑을 끝내는 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의 말처럼 송 해 없는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에 서지 않는 송 해는 국민들의 상상 속에서도 성립되지 않는 등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노래자랑은 평균 13% 대의 시청률을 유지한다. 방송 3사 가요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이다. 지난 2004년 한 쇼핑몰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이라크 자이툰 부대로 보내고 싶은 공연단 사회자로 송 해씨가 뽑히기도 했다.

 

송 해씨는 말 그대로 ‘국민 MC’다. 전국노래자랑에 최연소 세 살, 최고령 103세 노익장이 출연, 세기의 시작과 끝을 같은 무대에서 맺게 된 데도 국민 MC 송 해씨의 역할이 숨어 있었다.

 

온 국민과 함께 한 ‘딩동댕’ 17년. 아저씨, 할아버지에서 오빠 그것도 ‘젊은 오빠’로 불리며 세월을 거슬러 살아가는 송 해씨는 “가리는 음식 없이 무엇이든 잘 먹고, 누구를 만나도 함박웃음을 웃는 것이 건강 비결”이라고 귀뜸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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