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0] 밤사이 노는 이야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0] 밤사이 노는 이야기
  • 관리자
  • 승인 2023.03.20 09:29
  • 호수 8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밤사이 노는 이야기

때는 구월 보름이었다. 달빛은 희부연데 서리와 이슬이 옷에 내렸다. 동네 어귀는 낙엽이 깊어 정강이가 푹푹 빠졌다. 걸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내니 마을 개들이 모두 놀라 컹컹 짖었다. 방에 들어서는 삶은 닭을 찢고 술잔을 돌리며 동이 트려 할 때까지 이야기했다.

時則九月望也. 月色微晦, 霜露下衣. 洞門落葉深沒脛, 

시즉구월망야. 월색미회, 상로하의. 동문낙엽심몰경,

隨步履索索作聲, 洞犬皆爲之驚. 旣入室, 裂烹鷄觴之, 談至將曙.

수보리삭삭작성, 동견개위지경. 기입실, 열팽계상지, 담지장서.

-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소호당문집(韶濩堂文集)』 4권, 「방산서료기(方山書寮記)」


1890년, 이 글을 짓고 저자는 내심 득의(得意)하였다 여기고 있었다. 「방산서료기」가 참으로 좋던데요, 혼자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한마디 말을 중국의 문인 주증금(周曾錦, ?~1920)으로부터 들었을 때 작가는 등허리에 찬물을 맞은 듯 깜짝 놀랐다.

평산(平山)의 남쪽, 방산서료의 주인 우종학(禹鍾學)은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난 김택영의 팔을 붙들고 부지런히 시(詩)를 묻던 청년이었다. 선생이 마을에 들르는 하루조차 놓칠까 그는 크게 벼르고서 창강(滄江)을 집으로 이끌어 밤을 꼬박 새웠다. 만추의 상로(霜露)는 선생이 선영(先塋)에서 일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그의 옷자락을 먼저 적셨을 것이다. 보름의 멀건 밤은 계절에 이울어 우듬지로부터 내려앉은 갈잎처럼 바스러질 듯 고요했다지만 그들의 말간 밤은 도(道)의 누각에 오르는 문(文)의 사다리를 얽느라 꽤나 요란스러웠으리라. 시절이 옮아 한겨울, 밤사이 노는 이야기로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칸장방(四間長房)에 신선로(神仙爐) 김이 서리고 서린다. 숯이 활씬 피어서 난만(爛漫)한데, 밖에서는 쇠쪽이 우그러지는 듯이 겨울이 달린다. 멀리 구월산(九月山)으로 뚫린 북창(北窓) 유리에는 성에가 겹겹이 짙어지는데 밤도 따라서 두꺼워 간다. 성에가 나를 오싹 무섭게 굴기에 얼른 순배에 뛰어들었다. 지껄이고 흥얼대고 읊고 부르는 것이요 한 되들이 병이 몇 차례씩 갈아들어 즐비하게 놓이는 것이다.

1939년,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수필 「안악(安岳)」(원제 「전귤(煎橘)」) 한 도막. 시인은 빼앗긴 나라의 남녘에서 북쪽까지 여행하며 이 땅 곳곳의 사람들이 지닌 생김이며 말투, 노래들을 찬찬히 보고 듣고는 여러 편의 글들에 곱게 남겼다.

이날 밤은 엄동(嚴冬)의 서도(西道) 한 방에 들어앉아 「늘난봉가」며 「감내기」, 「수심가」 따위를 들었다. 「수심가」는 그 비애로움이 단순하고 소박한 리듬에 불거져 나와 오히려 근대적이라고 시인은 여겼던 것인데 그 밤 노래를 부른, 대동강 물 건너 평양에서 온 화련(花連)은 독한 고뿔에 걸려 그 소리가 한결 컬컬하였다. 그리하여 이 고을 바닥나기 마음 좋은 이화(梨花)가 귤껍질을 술에다 달여 사사로이 약을 만들어 내었기에 “만실(滿室) 귤향(橘香)에 섣달 추위도 바로 봄철다이 훗훗하여지는 것”이었다.(하략)

송호빈 고려대 한문학과 조교수(출처: 한국고전번역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